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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이 Jan 05. 2021

눈 내리는 길을 걷는 마음으로

아직은 재미있는 게 더 힘이 세다.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서슬 퍼런 칼날 위에 서있는 듯한 예민함의 지속. 해가 뜨면 휘모리장단에 맞춰 널을 뛰다 해가 지면 녹턴의 멜로디를 따라 끝없는 고요에 침잠하는데, 그러니 귓속까지 울리는 심장박동이 환희에 의한 것인지 피로에 의한 것인지 그 경계가 희미할 따름이다.

눈을 감는다. 가쁜 호흡을 의식한다. 들숨과 날숨에 맞춰 관자놀이가 들썩인다. 나도 모르게 꽉 쥐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모든 걸 놓고만 싶다. 놓고 싶은 것도, 놓지 않는 것도 내 의지. 자꾸만 극단으로 멀어지는 하나의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아등바등이다.

택시 밖으로 눈이 찔끔찔끔 나린다. 안전히 집 앞까지 바래다준 기사 아저씨께 공손히 인사하고 차에서 내린다. 찰나에 이것이 오늘의 첫 친절은 아니었을까 구겨져있던 시간들이 머릿속에서 펼쳐진다.  택시에서 내렸던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다. 도로 아스팔트가 눈으로 가릴락 말락 애매하게 덮인다.

지금쯤 내 고향은 바닥에 푹푹 내 꽂히는 신발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눈이 가득 쌓였을 텐데. 아 이 도시는 이런 애매함으로 빛나고 있는 걸까. 완전히 내려놓지도 완전히 채우지도 못하는 이들의 갈팡질팡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처럼 보이고 마는 걸까. 밸런스를 울음소리처럼 부르짖으면서도 스스로 그 균형을 뿌리치고 있는 걸까.

슬프게 올려다본 하늘이 완전히 잿빛이다. 내 마음을 푹 담갔다 뺀 것처럼. 가로등에 비치는 여린 눈발이 안타깝다. 조금만 더 세차게 내려보지 그래. 우리는 아직 젊고 새하얗고 빛나잖아. 새벽 한 시.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려다 다시 발길을 돌려 차가운 겨울밤 위를 걷는다.

이 가슴속의 폭풍은 언제 멎으려나. 바람 부는 세상에 나 홀로 서있네. 갑자기 떠오른 노랫말이 그리워 이어폰을 꺼낸다. 여전히 덮이지 않은 아스팔트 길과 멈출 듯 멈추지 않고 내리는 눈을 번갈아 바라본다. 횡단보도 위의 빨간 불이 유난히 길다. 빨간 불이 이렇게 반가운 일일까. 간간히 얼굴 위로 맺히는 시원한 눈송이들을 잠자코 맞이한다. 이대로 멈추고 싶다.

이윽고 바뀌는 초록 불 아래 발길을 재촉하는 숫자들이 밉다. 서둘러 걷는다. 그래도 눈이라고 길이 제법 미끄럽다. 발가락 끝에 힘을 꽉 준다. 중심을 잡고 속도를 줄인다. 맞아. 눈이 오면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느리고 신중하게 걸었지. 펑펑 쏟아지는 눈을 보며 마냥 신나 하다가도 넘어질까 무서워서 호주머니 안에 손도 못 넣고 조심조심 내디뎠는데. 그래도 즐거운 마음이 더 컸는데.

저녁에 먹었던 식사가 이제야 소화가 된다. 그래 아직은 재미있는 게 더 힘이 세다. 넘어질까 무서워도 즐겨볼 만하다. 다만 속도를 좀 조절해보는 걸로. 눈 내리는 길을 걷는 마음으로. 빠름에 취하지 않고 느림에 안주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2020.12.18 3:25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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