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보고
폭풍이 잦아들고 평온이 찾아왔다. 가만히 누워있는 것도, 밥을 차려 먹는 것도, 파란 하늘을 보며 출근하는 것도 기분이 좋았다. 이 기분에 굳이 행복이란 이름표를 달고 싶지 않았다. 기분이 좋은 걸 행복이라고 정의 내려 버리면, 그 반대의 상황에는 자연스럽게 불행이라 써진 이름표가 붙을 테니까. 기분이 좋은 건 그냥 기분이 좋은 거고, 그 상태를 만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즐거움을 방해하는 모든 잡념들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영원히 이런 감정 속에만 머물고 싶었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주인공 리즈는 지리멸렬한 결혼 생활과 그로부터 도피한 연애에서 망가져가는 자신을 느낀다. 모든 것을 내려두고 인도로 떠난다. 저마다의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명상센터에서 사람들과 대화하고 명상하며 마음을 회복해나간다. 그러다 새로운 사랑을 마주한다. 다시 찾아온 사랑의 환희는 잠시, 금세 두려움이 몰려온다. 겨우 찾은 균형이 다가온 사랑으로 인해 깨질까 봐. 이 사랑도 머지않아 뻔하기 짝이 없던 과거처럼 변색되고 말까 봐. 함께 떠나자는 애인의 말을 뒤로하고 도망친 그녀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 구루에게 간다.
“애인이랑 사랑도 잘하고?”
“그건 끝냈어요.”
“왜?”
“균형을 잃을까 봐.”
“내 말 잘 들어. 때론 사랑하다가 균형을 잃지만 그건 더 큰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야.”
이 장면을 보는데, 예전에도 본 영화였는데 왜 눈물이 났던 건지. 어렵게 찾은 지금의 평온을 잃는 게 두려웠던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았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게 망설여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고 정면 돌파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잃어버린 나를 다시 채워가는 이 시간이 언젠가 또 흐트러지지 않을까, 그래서 다시 캄캄한 동굴 속으로 스스로를 가두는 게 아닐까 하는 조바심이 잔잔한 현재의 사이사이에 꽂혀있었고 나는 그걸 필사적으로 무시하던 중이었다. 안정과 혼란의 경계선을 자주 오르내리는 내 안간힘이 초라해 보여서.
며칠 있다가 영화 한 편을 더 꺼내보았다. 역시나 예전에 한번 봤던 영화였는데 왠지 모르게 끌렸다. <Call me by your name>이라는 제목이 달콤해서였을까? 그 끌림의 이유는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 알았다. 영화 후반부, 엘리오의 아빠가 아들에게 건네는 위로가 내게 필요했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려고 마음을 잔뜩 떼어내다간 서른쯤 되었을 때 남는 게 없단다. 그럼 새로운 인연에게 내어줄 게 없지. 그런데 아프기 싫어서 그 모든 감정을 버리겠다고? 너무 큰 낭비지. 나도 기회는 있었지만 너희와 같은 감정은 못 느껴봤어. 늘 뭔가가 뒤에서 붙잡았지. 앞을 막기도 하고.
어떻게 살든 네 인생이지만 이것만 기억해. 우리 몸과 마음은 단 한 번만 주어진다는 것. 너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다 닳을 거고 몸도 그렇게 될 거야. 아무도 바라봐주지 않을 때가 올 거고, 다가오는 사람도 적어지겠지. 지금의 그 슬픔, 그 괴로움, 모두 간직하렴. 네가 느꼈던 기쁨과 함께.
삶은 영원히 반복되는 거라고, 니체가 말했다. 기쁨도 즐거움도 슬픔도 고통도, 내가 살아온 삶은 그대로 반복되기에 최선을 다해 현재를 살아야 한다고. 그렇기에 니체는 영원회귀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계속 나아가는 사람을 가장 높은 차원의 인간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사람을 위버멘쉬(UberMensch), ‘극복하는 사람’이라고 칭했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극복했다는 결과가 아니라 극복해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균형을 맞췄다는 결과가 아니라 균형을 잃어도 다시 맞춰가는 과정인 것이다. 모든 걸 다 정리했다는, 모든 게 다 나아졌다는 결과만 얻으려 하고 그 과정 속에 있는 나를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 평온의 껍데기 속에 끓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은 영원히 그 안에 머무르고 만다. 엘리오의 아빠가 말했듯이 과정 속에서 느껴지는 모든 감정을 충실하게 느끼고 돌보아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돌아보면 이 과정 속에서 나는 한 뼘씩 좀 더 괜찮은 사람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예전의 나는 정말이지 안하무인과 유아독존으로 살았다. (엄마 말을 빌리면) 개뿔 잘난 것도 없는 주제에 참 건방졌다. 실패하고 좌절하고 슬픔에 빠져보고 나서야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들을 이해할 수 있었고, 혼자서 뭐든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 뒤에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던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음을, 부족한 사람과 부족한 사람들이 만나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위안이 되고 기쁨이 되어주며 어제보다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을 뿐임을 실패와 좌절, 슬픔을 극복하는 시간을 겪으며 알았다.
며칠 전, 오랜만에 친구들과 속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오열이 터져 나왔다. 쉬쉬하고 있었던 두려움이 마침내 터져 나온 순간이었다. 친구들은 모든 걸 다 알고 있던 것처럼 놀라지도 않고 그저 내 손을 어루만지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내내 울다가 엄마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든 아기처럼 힘겨움을 한껏 토해내고 친구들의 토닥임을 느끼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이 기쁨도 금세 사라지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에 좇기지 않는 기쁨. 그제야 완벽하게 편해졌다.
영화 <먹고 사랑하고 기도하라>에서 주인공 리즈는 구루의 말을 듣고 다시 애인을 찾는다. 그리고 말한다. 아트라베시아모(함께 건너보자). 한 번도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좌절이 두려워 나아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실패에서 배우고 좌절해도 나아가는 사람이 되자. 함께 건너 줄 사람들이 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