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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이 Feb 24. 2021

잠시 멈춤과 종료를 혼동하지 말 것

글태기의 끝에 서서

내 시간은 글황기(글 성황기)와 글태기(글 권태기)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다. 어떨 때는 매일 한 편 이상의 글감이 떠올라서 호록 호록 잘만 써지는데, 어떨 때는 책상 앞에 계속 앉아 있어도 문장 하나 써지지가 않는다.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고, 느끼고 싶지도 않은 날이 대체로 그렇다.


그러니까 글은 영감으로 쓰기보다 체력으로 쓰는 것에 가깝다. 한때는 이런 불규칙성에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꾸준히’는 평생 내 단어로 가져보지 못하는 걸까. 어째 글황기 같은 하이텐션을 두 달을 넘기지 못하는 걸까. 내 특기 중 하나인 자아비판은 이 문제 앞에서 더욱 빛을 발해서 펜을 놓아버린 나를 맹렬한 기세로 좇아왔다.


‘꾸준히’의 기준이 각박하다는 게 문제였다. 매일 한번 쓰기로 했다가 하루를 넘겨 퇴근하는 일이 많아져버리니까 이틀에 한번 쓰기로 했다가 이 역시 직장인에게는 너무 가혹한 처사인 듯싶어 3일에 한 번으로 바꿨다가 질려버렸다. 바코드처럼 촘촘히 늘어선 마감기한 안에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날이 잦아지니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는 마음만 끌어안고선 노트를 멀리했다. 나를 작게 만드는 그 작은 노트가 미워졌다. 왜 그렇게 애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을까. 지나치게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도 자기 파괴적 행동 중 하나라는 걸 며칠 전 알았다.


설 연휴가 찾아오기 직전, 일로 가득 찬 평일과 사이드 프로젝트와 약속으로 점철된 주말들을 보냈다. 비커 같은 데 내 체력을 담아 재보면 1g 정도가 찍혀있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고갈되기 직전이었다. 2025년까지의 체력을 다 당겨 쓴 느낌. 설 연휴에는 울릉도 집에서 신생아와 다름없는 나날을 보냈다. 하루에 세 번 먹고 세 번 잤다. 4개월 동안 일주일에 3번 이상 해온 <요가+글쓰기> 리추얼을 아예 못했다. 새벽 2시에 퇴근해도 매트를 피던 때가 있었는데 말이다.


3박 4일을 내리 쉬며 한 60% 정도 충전이 완료된 상태가 되었을 때 리추얼 종료 화상 채팅을 했다. 리추얼을 하는 동안 요가를 알려주고 글감을 던져주신 선생님과 함께 리추얼 미션을 수행한 분들과 함께 그간의 소회를 나누는 자리였다. 돌아가면서 소감을 말하고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말문이 살짝 막혔다. 꾸준히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순간 턱 하고 올라온 거였다.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정해진 기간 안에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과 체력 고갈 때문에 글이 제대로 써지지 않았다고.


혼잣말하듯 속에 있던 답답함을 털어놓자 선생님이 따뜻한 음성으로 답해주었다. 그럴 때 자신은 떠오르는 생각의 키워드만 써두기도 하는데 나중에 그게 좋은 글감이 될 때도 있으니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말이다. 얼마나 다정한 위로인가. 여담인데, 이 지혜로운 사람은 나를 리추얼의 매력으로 빠지게 만든 곰곰요가​ 예슬 선생님이다.  2020년 만난 가장 소중한 인연 중 한 분. 그저 습관 만들기를 목표로 시작한 건데  선생님 덕분에 나를 위해 하루의 끝을 마무리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집에서도 평온한 마음으로 요가를 시작해보고 싶다면 예슬 선생님의 채널을 추천한다.


다시 돌아와서,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글을 꾸준히 쓰지 않은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료 버튼을 누르는 것과 잠시 멈춤 버튼을 누르는 건 아예 다른 건데 자주 착각했다. 잠시 멈춤 버튼을 선택한 것뿐인데 그걸 강제 종료로 인식하고 혼자 화를 낸 꼴이었다. 내 마음에 드는 글을 쓸 만한 체력과 마음가짐, 글감이 갖춰지면 굳이 결심하지 않아도 가장 먼저 노트를 펼쳤는데 말이다.


루틴에 한번 어긋나면 뾰족이 솟아나는 이탈의 불규칙성을 참지 못해 끓어오르는 자괴감을 이제는 잘 다독여보기로 했다. 단어 하나라도, 문장 하나라도 남기는 날은 잠시 멈춤 버튼을 누르는 거라고 알아주기로 했다. 오랜만에 노트 4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글을 썼다. 뜨끈한 사우나에 다녀온 것처럼 개운하다. 어쩌면 글쓰기는 청소 같은 것이겠다. 그리고 나는 써야만 하는,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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