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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이 Aug 27. 2017

너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밤이 더 빛나는 도시, 부다페스트

헝가리를 떠올리면 머릿속 스위치가 탁-하고 꺼진다. 잠깐 껌껌하다 이내 주황색 불빛이 생각 곳곳에 퍼진다. 부다페스트의 야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깨끗한 하늘, 따뜻한 햇살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밤이 낮보다 아름답긴 힘들다. 야경도 야경 나름의 맛이 있겠으나 그건 도시의 아름다움 때문이기보단 내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둡고, 장소를 막론한 밤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부다페스트는 달랐다. 그냥 밤이라서가 아니라 부다페스트의 밤이라서 아름다웠다. 여러 도시에서 여러 밤 모습을 눈에 담았지만 아직 그곳을 능가하는 야경은 본 적이 없다. 야경을 만나기까지의 기다림마저도 사랑스러웠다.



성 이슈트반 대성당


부다페스트 역시 프라하만큼이나 좁은 곳이었다. 이제야 조금 익숙해진 체코에서 초면인 헝가리로.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정서적으로는 낯설기 짝이 없는 나라로의 여행에 한껏 긴장했던 몸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추욱 늘어졌다. 하지만 낯선만큼이나 설렌 마음을 호스텔 침대 따위에나 얹어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만보기로는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의 걸음을 걸은 탓에 발은 퉁퉁 붓기 시작했지만 우리는 다시 걸었다. 젊음은 어쩌면 부지런한 발을 달리 말하는 것이 아닐까.


호스텔은 성 이슈트반 대성당 가까이에 위치했다. 헝가리에 기독교를 전파한 이슈트반 왕을 기리기 위해 완성된 이 성당의 높이는 96m. 헝가리가 건국된 896년을 의미한다고 한다. 100m도 채 안 되는 높이였지만 앞으로 다가갈수록 경건함이 드는 건 왜일까. 지어지는데만 50년이 든 그 세월이 고스란히 나타나는 품격으로 도시의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성당의 풍채에 종교가 없단 이유로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었다.





승무원인 유진이 언니가 추천해주었던 식당 MENZA 로 갔다. 동유럽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슈니첼과 헝가리 전통 음식이었던 굴라쉬를 주문하고, 빼놓을 수 없는 맥주도 우리 앞으로 유인했다. 평소 라면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기에 한국에서 짐을 쌀 때도 '유럽까지 가서 라면을 먹겠나' 하고 가볍게 무시했는데 그게 어찌나 후회스럽던지. 프라하에서 한인마트를 찾아다니면서까지 라면을 끓여먹었더랬다. 틈만 나면 얼큰한 게 땡기던 차에 육개장과 꼭 비슷한 굴라쉬의 등장은 가히 기적이었다. 어제 맥주 한 짝은 들이킨 사람처럼 호로록 호로록 잘도 들이마셨다.




세체니 다리


매콤한 굴라쉬와 시원한 맥주 한 잔의 조합이 두레박이 되어 피곤에 지쳐있던 기분을 한 껏 끌어올려주었다. 깃털 같은 구름이 하늘을 떠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 역시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세체니 다리를 건넜다. 부다 지구와 페스트 지구를 가로지르는 다뉴브 강의 상쾌한 바람이 뜨거운 태양에 익고 있는 피부에 고스란히 와 닿았다. 





부다페스트에서 야경을 볼 수 있는 곳은 크게 두 군데였다. 어부의 요새와 겔라르트 언덕. 겔라르트 언덕이 더욱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진가는 마지막 날 확인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첫날 야경을 즐길 어부의 요새로 향했다.


도나우 강변의 모든 건물은 도시 미관을 위해 사진 속 우뚝 솟아 있는 성 이슈트반 대성당보다 높이 지어질 수 없도록 나라의 제한을 받고 있단다. 고작 건물 높이 가지고 웬 유세냐 할 수 있겠지만 하늘까지 닿을 듯한 마천루로 빽빽해 시야까지 빽빽해져 버리는 서울과 비교해보면 이런 규제가 꽤나 반갑게 느껴진다. 높이를 욕심내지 않는 앙증맞은 건물들 너머로 탁 트인 지평선이 드넓게 펼쳐진 하늘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누리게 해주었다. 글을 쓰는 이 카페 안에서도 그 날의 바람이 느껴진다.



어부의 요새
마차시 성당


어부의 요새는 말 그대로 '어부'의 '요새'였다. 중세 시대만 해도 도나우 강에서 왕궁 어시장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던 이 곳을 19세기 어부들이 강 건너에서 기습을 해오던 적을 지키는 요새로 사용한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어딘가 모르게 익숙했던 에피소드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안용복 장군의 이야기와 비슷했다. 그 역시 어부의 신분으로 독도를 지켜내지 않았나. 갑자기 헝가리가 형제의 나라처럼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어부의 요새는 고깔모자를 쓰고 있는 7개의 탑에 둘러싸여 있었다. 건국 당시의 일곱 부족을 의미한다는 이 탑들을 따라가다 보면 길다란 성벽 끝에 위치한 마차시 성당을 만나게 된다. 





국회의사당


어부의 요새 성벽을 따라 황금빛 불빛을 뽐내는 부다페스트의 야경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도시 곳곳이 번쩍번쩍 금빛 번개를 맞은 듯한 자태를 뽐냈다. 심지어 이 날은 슈퍼문이 뜬 날이었다. 온 우주가 부다페스트의 밤을 아름답게 치장해주던 날이었다. 


말로만 들었던 이 밤의 풍경을 실제로 목격한 우리는 하도 탄성을 지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더이상 와- 소리도 내지 않게 되었다. 그냥 이 순간에 이 도시에 우리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 기분을 그대로 가지고 성벽을 타고 내려와 세체니 다리를 바라보며 레몬맥주와 함께 꿀꺽꿀꺽 삼켜내었다. 그대로 그 곳에 물들고 싶었다.





이튿날의 일정은 단촐했다. 사실 부다페스트는 야경 외에 별달리 기대하고 온 것이 없었다. 호스텔이 괜찮았다면 낮 시간동안은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동안의 여독을 풀며 휴식시간을 가졌을텐데 그러기엔 너무 낡고 찝찝한 곳이었다. 반강제적으로 호스텔을 나서 영웅광장으로 향했다. 어부의 요새가 상징하던 7개 탑의 주인공, 일곱 부족의 부족장들과 헝가리의 왕, 영웅들이 새겨져있는 곳이었다. 실제의 목적은 이 광장이 아닌 바로 옆 잔디 밭이었다. 호스텔의 꿉꿉한 습기와 내리쬐는 뙤약볕을 피해 우리는 잔디밭에 드러누워 낮 시간을 보냈다.




이제 마지막 야경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다. 해의 높이와 반비례하여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진다던 겔라르트 언덕에 올랐다. 온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로 북적댄다길래 좋은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일찌감치 언덕에 올랐다. 어제보다 구름의 흔적이 진해 잠깐 걱정했지만 아무렴 구름 따위에 가려질 아름다움이 아니라는 걸 어제 몸소 확인하였기에 찰나의 걱정은 스치듯 지나갔다.



강 반대편에서 본 겔라르트 언덕, 자유의 여신상이 우뚝 솟아있다.
시타델라 (치타델라 라고도 한다)


부지런을 떤 덕분에 도나우 강이 크게 내려다보이는 계단에 자리를 잡았다. 친구들은 명당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해가 지길 기다렸고, 나는 겔라르트 언덕 바로 위에 있는 시타델라를 보기 위해 조금 더 깊이 걸어 올라갔다. 


시타델라는 헝가리 근현대사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식민지였던 헝가리의 독립운동을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독일군의 요새로 사용되었다가 나치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소련군에게 점령당했다. 사진 속 '자유의 여신상'이라 불리는 이 동상 역시 소련이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여신이 들고 있는 것은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의 잎사귀로 소련의 하늘을 향해있다고 한다. 식민지부터 공산주의까지. 우리의 역사와 비슷한 아픔을 품고 있는 이 지구 반대 편의 나라가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동상의 모습을 따라하며 즐거워하는 관광객들 사이에서 나는 홀로 두 국가의 설움을 마음 속에 진 채 겪어보지도 못했던 과거로 돌아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멜랑꼴리한 기분은 묻어두고 다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계단으로 향했다. 셋이 쪼로록 앉아 당분간 (언젠간 다시 갈테니) 보지 못할 부다페스트에서의 마지막 야경을 만끽했다.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도시는 이제야 잠에서 깬듯 마음껏 화려해졌다. 아, 사진으로는 다 담아내지 못할 이 곳의 풍경이 다시 그리워진다.





자유의 여신상과 슈퍼문과 우리.





강 건너로 부다 왕궁이 빛나는 모습을 보며 그렇게 부다페스트의 밤과 헤어졌다. 우리는 나란히 걷지도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은 채 강가를 걸었다. 강가가 좁았던 것도 아닌데 저마다의 기분에 취해 일렬로 조금의 간격을 둔 채 이 곳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강바람은 시원했고, 야경은 아름다웠고, 양쪽 귀에 자리잡은 이어폰의 노래는 감미로웠다. 그런데 무엇이 그렇게 슬펐을까. 이 밤의 끝을 잡고 가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은 풍경이었다. 물론 떠난 건 밤 뿐만이 아니었다. 밤이 떠나고 새벽이 찾아올 무렵, 우리 역시 헝가리를 떠나 오스트리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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