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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이 Jan 06. 2018

4시간의 러닝타임, 그보다 오래 남는 여운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모든 이미지의 출처는 <네이버 영화> 입니다.



어느 금요일 저녁, 토르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았다. 상영 직전 나오는 예고편에서 처음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을 만났다. 옛날 영화 특유의 바랜 색감, 풋풋한 주인공의 모습과 대비되는 제목 덕에 자연스레 끌렸다. 영화가 끝난 후 검색해보니 당대 여러 평론가들에게도 극찬을 받은 작품이었다. 4시간의 러닝타임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도전정신까지 불러일으켰다. 바로 [예매] 버튼을 눌렀다.


10분의 인터미션 시간에도 자리를 벗어나지 않아 꼬박 4시간을 영화관 좌석에 푹 앉아있었다. 지루해서 졸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도 있었기에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또렷한 정신을 유지했다는 사실이 일단 다행스러웠다. 어딘가 뿌듯한 마음으로 영화관을 나서 컴컴해진 시내를 걷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몽글몽글했다. 심장이 쫄깃해지는 긴장감도, 스크린을 가르는 화려한 액션도 없었는데 순간순간 영화 속 장면들이 내 주변을 맴돌았다. 여기가 2017년의 한국인지, 1950년대의 대만인지 시공간이 흐릿해지는 기분이었다.




듣던 대로 에드워드 양 감독의 미장센은 대단했다. 모든 구도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색감 역시 마찬가지. 만들어진 지 20년이 훌쩍 넘은 영화임에도 전혀 촌스럽지 않았다. 완벽한 구도의 정석이 아닐까. 다른 영화의 2배 정도 되는 분량이 진행되는 동안 이어지는 수많은 장면 중 허투루 만들어진 장면은 단 한 컷도 없었다. 영화 초반, 주인공 샤오쓰는 프레임 안에서 늘 갇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집안의 창이나 벽, 그의 방이 항상 그의 세계를 가로막고 서있다. 이 벽은 밍을 만나면서 서서히 사라진다. 칼을 들고 소공원파의 싸움에 가담하기도 하고, 선생님께 대들기도 한다. 감독이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이 구도의 변화로 샤오쓰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스토리의 힘은 빼놓을 수가 없다. 샤오쓰와 밍, 217파와 소공원파, 샤오쓰의 아버지와 대만의 정부 관료. 각 인물의 이야기가 날실과 씨실처럼 촘촘히 얽혀있다. 이들 사이의 갈등은 얼음처럼 차갑지만 마냥 날카롭지만은 않다. 어딘가 허술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그렇게 잔잔히 엮여가던 인물들은 영화가 끝나기 30분 전,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제각기 풀려버린다. 결말쯤 가서야 4시간의 러닝타임에 잠겨있던 호기심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그래 이 영화 제목은 '살인사건'이었지.




이 영화는 실제로 일어났던 대만 최초의 미성년자 살인사건을 다룬다. 영화의 오프닝에도 나오듯 당시 부모 세대는 자식 세대가 당신들이 겪은 혼란으로부터 자유로워져 편안하게 살길 바랐다. 그러나 영화의 배경인 1950년대 대만은 그야말로 혼란의 시기였다. 대만은 정착하지 못한 나라였다. 대만의 국민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가 청나라 시절 대만으로 이주한 내성인이고, 두 번째가 장개석이 대만으로 갈 때 함께 이주한 외성인이다. 내성인의 수가 약 80%로 우세하지만 외성인이 내성인과 소수의 대만 토착민을 철저히 배척하며 사회를 장악 한터라 대만 내부에서도 첨예한 갈등이 이어지던 상태였다.


그들을 지배했던 일본 (청나라 당시 일본과의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대만 영토가 일본에 할양되었다.) 의 흔적은 여전히 그들의 삶 속에 녹아 있었고, 그 그림자가 채 걷히기 전 미국의 자본주의 문화가 그 위를 덮어 왔다. 국민당 정부 역시 공산당을 완전히 축출하기 위해 은밀히 국민을 사찰하고 의심되는 이들은 모두 잡아들여 고문했다. (미군정과 친일파, 임시정부(독립군)가 한데 엉켜 혼란스러웠던 우리나라의 해방 직후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이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아이들이 기댈 곳은 없었다. 결국 아이들은 이 폭력의 역사 속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폭력단을 만들었다.




샤오 쓰는 분명 피해자였다. 친구들은 틈만 나면 경쟁파와 싸움을 벌이기 일쑤였고, 존경했던 형은 경쟁파 보스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늘 자기편이 되어주었던 아버지는 정부 관료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서로를 향한 의심이 가득한 사회에서 '미래는 노력해서 만들어나가는 거잖아요 아빠. 걱정 마세요. 열심히 공부해서 주간반으로 갈게요.' 하고 아빠를 위로하던 소년의 모습은 연기처럼 희미해졌다. 결국 영원할 것처럼 보였던 밍을 향한 그의 사랑에 금이 갔고, 그 틈을 불안이란 감정이 채워버렸다. 


샤오쓰가 스스로를 약하다고 느끼지 않는 순간은, 누군가로부터 쓸모 있는 사람이 된 순간은 오직 밍이 찾을 때뿐이었다. 결국 자신보다 더 약하고 불쌍한 밍이 기댈 곳이라곤 자신뿐일 거라 믿었던 샤오쓰는 그 믿음이 무너지자 밍에게 칼을 던진다. 샤오쓰는 밍에게 남은 건 자신뿐이라며 부르짖었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주변이 폐허가 된 샤오쓰에게 남은 것이 오로지 밍뿐이었다.  




그래서 한 리뷰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영화는 샤오쓰의 성장담이라고.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한 소년의 성장의 대가가 한 소녀의 죽음이라니. 말했듯 샤오쓰는 분명 혼란스러운 사회의 피해자이다. 동시에 밍에게 일어난 비극의 가해자이기도 하다. 샤오쓰가 수감된 이후에도 그의 가족은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이 살아가고, 그의 친구는 그에게 엘비스 프레슬리의 신곡을 들려주기 위해 우편을 부쳐준다.


밍의 흔적은 없다. 천식에 걸린 엄마와 함께 가정부로 여러 집을 전전하는 밍의 삶은 죽음과 동시에 지워졌다. 그녀의 엄마는 그녀의 죽음 소식을 듣고 반지를 삼켜 자살을 시도했다. 그를 돌봐주던 의사에게는 기자들이 떼로 찾아가 그녀와의 스캔들을 묻는다. 너무 치졸해서 화가 나고, 너무 현실적이라 울분이 터진다. 영화는 말한다. 한 사회가 격동하는 시기, 그 불안과 분노는 가장 약한 자들에게 가장 큰 몫으로 돌아간다고.


영화가 끝날 때쯤 라디오의 방송이 들려오고, 국립정치대학 합격생을 발표한다. 샤오쓰는 대학생이 되었다. 밍은 없다. 밍은 잊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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