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의 이해. 그리고 노력.
나와는 다름의 이해. 그리고 나의 노력.
항상 '나'라는 사람을 생각해 보면 나는 나를 포함해 타인을 너무 이해하려고 해서 힘든 적이 많았던 것 같다. '저 사람은 왜 저런 행동을 할까? 어떤 사연이 있어서 저러는 걸까? 다 이유가 있을 거야. 난 그 이유를 알아내고 이해하면 돼. 그래야 내가 그 행동에 상처받지 않아도 되는 명분이 생기니까.'
나에게 있어서 '내가 힘들고 아프니까 이런 감정을 갖는 건 당연해. 상대방의 의도가 어떻든 나는 지금 힘들어'라는 말은 이기적인 말이다. 내가 상처를 받아도, 상처 준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더 집중했다. 나의 상처는 당연한 게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이해로 인해 내 상처도 치유되면 다행이지만 나는 그저 한없이 무기력해질 뿐이다. 웃긴 건 가끔 이런 나를 바라보다 결국엔 연민의 감정을 갖는 나 자신이 또 싫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끊임없이 어떠한 기준에 나를 맞추고, 내가 드는 감정을 내가 무시하고, 자기검열에 빠져서 허우적댄다. 이렇듯 나는 상처를 받을 수도, 상처를 주기도 두려운 사람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서로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해주면 안 되냐고.
난 화가 났다. 싫어도 싫다는 말을 하지 말고, 다 참고 좋은 말만 해달라는 것 같아서 화가 났다. 하지만 나는 화를 티 내지 못하고 수일을 거쳐 곱씹고 되뇌어 생각하다 보니 그제야 그 사람의 속뜻을 알 수 있었다. 이해와 존중을 받고 싶고 나를 사랑해달라는 말.
문장 자체만 본다면 처음 들었을 때의 나처럼 이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사람과 내가 함께 지나온 시간, 그리고 유대관계와 믿음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하고 싶은 속뜻과 의미는 따로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 중에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이 훨씬 길지만, 이들보다 중요한 건 나와 가까운 관계를맺는 가족과 지인,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당장 내 옆에 앉아있는 팀장님 보다 힘든 사람들이기도 하다. 정신 차리고 서로를 돌보지 않으면 감정의 골은 어마 무시한 속도로 깊어진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이 모든 걸 생각하고 이해하려는 나 자신이 너무 힘들다. 너무 최선을 다하려다 보니 가끔은 나를 갉아먹으면서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나는 생각이 너무 많고 과도하게 예민한 기질을 타고났다. 예민은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좋은 수단 중 하나이지만 과도하면 스스로를 쉽게 갉아먹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내면을 지킬 수 있는 방어벽을 세우기 위해선 나 이외의 사람들과 너무 끈끈하게 얽히고설키는 그런 유대감 말고, 적당히 가끔 손을 잡고, 살을 비빌 수 있는 그런 노력을 해야겠다고 오늘도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