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 우붓의 수박 라이스 필드

세계문화유산인 수박 시스템을 볼 수 있는 라이스 필즈

by 머슴농부


발리 우붓의 진짜 색을 만나고 싶다면, 결국은 ‘초록’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 초록을 따라 걷기 위해 수박 쥬욱 마니스 라이스 필즈 워크(Subak Juwuk Manis Rice Fields Walk)로 향했다.

우붓에서 ‘수박(Subak)’이라는 단어는 낯설지만, 그 의미를 알고 나면 이 풍경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


수박은 과일이 아니라, 발리의 벼농사를 지탱해 온 전통 관개 시스템이자 공동체 조직이다.


약 1,000년의 역사를 가진 이 시스템은 단순한 농업 기술을 넘어 종교·사회·정치가 하나로 연결된 삶의 구조이며,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우붓에서는 자주 마주치는 것이 있다.

바로 "천국의 문"이라 불리는 사원 입구이다.

우붓 왕궁을 지나 조금만 걸으면, 좁고 소박한 골목 하나가 논으로 이어진다.

그 길을 빠져나오는 순간,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온 듯한 전원 풍경이 펼쳐진다.


논에는 벼들이 익어가고 있었고 어떤 논은 이미 수확을 마치고 다시 새로운 벼농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입구에 서 있던 외로운 허수아비 하나가 이곳을 찾은 방문객들을 가장 먼저 맞이하였다.

논길을 따라 걷다 보면 이름과 날짜가 적힌 시멘트 블록들이 길게 이어지는데 가끔은 한글도 눈에 띈다.


일정 금액을 내고 글을 남기면 그 기록이 하나의 블록이 되어 이 길 위에 남는다.

마치 우리나라 사찰의 "기와불사"를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다.


논을 따라 길 양쪽으로 잔잔하게 흐르는 물이 바로 수박(Subak) 관개 시스템의 일부다.

이 시스템은 단순히 물을 나누는 기술이 아니다.

“물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라는 철학 위에 세워져 있다.


논의 위쪽에 있는 사람도, 아래쪽에 있는 사람도 같은 물을 공평하게 나눈다.


그래서 발리에는 물을 독점하는 농부가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이 작은 원칙 하나가 빈부 격차를 줄이고, 갈등을 막고, 권력의 집중을 억제한다.

발리인들은 말한다.

물은 흘러야 하고,

쌀은 순환해야 하며,

영혼도 떠나야 한다고.


그 흐름을 막으면 병이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일까.

이곳 사람들은 물을 막지 않듯, 감정도 오래 붙들지 않고, 심지어 죽음조차 담담하게 받아들인다고 한다.

논길을 걷다 보면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게 된다.


짧은 대화 속에서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서 왔다는 여행자를 만났다.


전쟁에 참여하여 비참하게 죽어가는 젊은 청춘들이 있는 반면에 해외에서 여행을 즐기는 젊은 청춘들도 있는 게 현실이다.


같은 시간, 전혀 다른 삶이다.

발리는 11월부터 4월까지로 지금은 우기철이다.


수박을 걷다 빗방물이 약간 떨어져 혹시나 해서 숙소 식당에서 커피를 시켰는데 빗방울은 그 몇 개가 끝이었다.


괜히 들어간 숙소 식당에서 커피만 한 잔 마셨을 뿐, 비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우붓의 비는 대개 밤에 잠깐 스치듯 지나간다.

정말 우기가 맞나 싶을 정도다.

기후변화를 실감한다.


나의 경우는 몇 년 전부터 일부러 비수기인 우기철에 동남아를 여행한다.

항공료와 숙박비가 저렴한 것도 이유지만, 여행 중 비로 불편을 겪은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내가 우기에 가면 비가 멈추고, 건기에 가면 비가 온다.”


아무튼 이번 여행도 그럴 것 같다.


논 한쪽에서는 농부가 차낭 사리를 올리고 있었다.

신에게 감사 기도를 올리는 발리의 일상적인 의식이다.

그리고 논 사이로 보이는 많은 오리들이 보였는데 이는 ”오리 농법“이다.


오리 농법은 논에 오리를 방사해 해충을 잡아먹게 하고, 배설물로 자연 비료 효과를 누리는 친환경 농법이다.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오리 농법으로 논농사를 지었던 곳들이 제법 있었는데 조류 독감으로 인해 지금은 시들해진 농법이다.


우붓에서는 여전히 오리농법이 살아 있고, 그래서인지 오리 요리도 자연스럽게 발달해 있다.

논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작은 시장이 나타났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물의 궁전(Water Palace)"이 있었다.


입장료가 있어 대신 식당으로 들어갔는데, 이곳은 전통 의상을 입고 사진을 찍는 공간이었다.

점심을 먹어보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맛은 기대 이하.

가격은 다른 식당보다 훨씬 비쌌다.

우붓을 찾는다면, 이곳에서의 식사는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다.


반나절을 둘러보았던 우붓의 논과 수박 시스템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할 수 있었다.


그곳은 사람과 자연, 신과 공동체가 조용히 그리고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는 발리의 삶이자 고유문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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