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자 입장에서 바라본 힌두교와 바라나시
바라나시에는 화장터 일명 버닝 가트(Burning Ghat)라 부르는 마니까르니까 가트(Manikarnika Ghat)가 있다.
솔직히 처음 본 바라나시의 화장터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신성한 공간”이라는 흔한 묘사와는 달리, 그저 힌두교의 화장 문화와 야외에서 이루어지는 장례의 한 방식일 뿐 그 이상의 감흥이나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화장터에 홀로 선채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노인의 모습이 생경스럽고 궁금하였다.
화장터 앞에는 화장에 사용할 장작을 가득 실어 운반해 온 배들이 정박되어 있었다.
그리고 화장하는 모습을 가족들도 지켜보고 소도 지켜보고 나 같은 여행객은 그저 무심히 바라볼 뿐이다.
많은 이들이 바라나시의 화장터에서 인생무상을 깨달았다고 말하지만, 나에게는 그러한 감정도 크게 공감되지 않았다.
인생무상은 굳이 바라나시 화장터가 아니더라도, 삶 속에서 언제든지 느낄 수 있는 것이며, 이미 수많은 선인(先人)들이 우리에게 수없이 깨우쳐준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바라나시 화장터에서 인생무상을 논하는 것은 다소 예능적이고, 상투적인 표현일 뿐이다.
어차피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부처도, 부활한 예수도, 무함마드도 결국 모두 죽음을 맞이했으며, 영생을 주장한 사이비 교주들도 결국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죽음은 필연적이며, 그 사실만으로 죽음을 특별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힌두교는 신화를 바탕으로 하는 종교다.
내 생각으로는, 다른 종교들이 그러하듯이 힌두교 역시 뛰어난 상상력을 가진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신화에 기반한, 인간이 창조한 종교일 뿐이다.
수천 년 동안 인도는 이러한 힌두교의 틀 안에 갇혀 있었고, 이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또 하나의 프레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화장터에서 시신이 도착하면 갠지스 강에 세 번 담근 후 화장한다.
힌두교도들은 강가(Ganga)를 천국에 이르는 계단으로 여기며, 화장 후 남은 재를 강에 뿌리면 윤회를 벗어나 하늘나라로 간다고 믿는다.
이런 믿음은 인간이 만든 스토리텔링이자 종교적 의식이며 가스라이팅이라 생각한다.
바라나시의 여러 가트(Ghat)를 걸으며 힌두교 신자들을 보면서, 종교가 때로는 건강한 사람들마저 무능력자로 만들어 버리는 마약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또한, 자연스럽게 칼 마르크스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말과 “인간이 만든 최고의 히트상품은 종교”라는 표현도 떠올랐다.
세상은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새 생명들이 태어난다.
모든 생명체는 모두 죽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자 불변의 진리인데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욕심과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인간의 욕심과 두려움이 신을 만들고 종교를 만들고 그리고 천당과 지옥을 만들었다.
바라나시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며, 갠지스 강에서 죽으면 모든 윤회의 굴레를 끊고 그들이 염원하는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힌두교도들의 성지다.
하지만 나 같은 무신론자이자 이방인에게는 그곳이 그들의 장례문화이자 하나의 종교적 의식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이 과연 잘못된 시각일까?
종교의 배타성으로 인해 수많은 도시와 건물이 파괴되고, 무자비한 폭력과 살상이 벌어진 역사적 사례들을 보면, 인간은 자신의 오류를 정당화하기 위해 신과 종교를 창조하였다고 의심해 본다.
바라나시는 오히려 나를 더욱더 확고한 무신론자로 만들었다.
바라나시에서 나는 신과 종교가 내 삶에 있어 무의미함을 다시 한번 깨달았지만, 그것이 수천 년 동안 수십억 명이 믿어온 종교와 그들의 문화, 전통을 비하하거나 무시나 경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나의 종교관과 그들의 신앙 간의 간극은 단순히 다르다고 말하기엔 너무나 크고 깊어, 어쩔 수 없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과학 기술 강국이자 세계에서 네 번째로 달 착륙에 성공한 인도의 모습과 바라나시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이질적으로 느껴졌고, 아직도 그 낯섦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