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단지 사냥이다, 바흐
소설 - 가느다란 실
- 시리즈 물입니다. 순서 대로 보시길 추천 합니다 -
5.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눈이 번쩍 뜨인다. 도서관 2층 열람실. 왜 계속 같은 시간이 반복되는 걸까. 아니면 꿈이 반복되는 걸까. 재빨리 벨소리를 꺼버리고 받지 않은 채 휴대폰 전원 버튼을 길게 누른다. 제조사 로고가 보이더니 휴대폰이 꺼졌다. 이번엔 재빨리 대응한 것 같다.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혹시나 하고 꿈에서 반복해서 봤던 여자가 있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없다. 몇 번이고 반복되었던 꿈에서 항상 그 자리에 앉아 있던 그녀가 없다. 그러고 보니 내 자리 주변 사람들도 처음 보는 느낌이다. 그제야 마음이 놓여 멋쩍은 웃음이 지어진다. 악몽을 꾸다가 깨서 긴장했었는지 등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하.. 이런 꿈을 꾸다니’
계속 헛웃음이 나온다. 독서건 뭐건 일단 가방을 들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나 했는데... 반복해서 꿈에 등장했던 <바든피아프의 죽음>이란 책도 없다. 실제 있는 책이기나 한 걸까. 지금은 궁금증도 갖지 말기로 한다.
2층 열람실 밖으로 나오니 목욕이라도 하고 나온 것처럼 개운하다. 도서관을 벗어나면 악몽의 고리를 완전히 끊을 수 있을 것 같다.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와서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실내를 벗어나니 사방이 탁 트이는 시원한 느낌과 함께 얼굴로 쏟아지는 따듯한 햇살이 얼굴이 청명함을 더한다. 일단 최대한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지. 대충 세수만 하고 잠다운 잠을 청해야겠다.
큰길로 나와서 인도를 걷는데 고작 2km 남짓한 집까지의 거리도 빨리 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을 찾아보니 저쪽에 택시 정류장이 있다. 주저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뛰듯 걸어간다.
“손님~ 여기에 타세요~”
손님을 기다리며 밖에서 담배를 피우던 기사가 나를 보더니 반기듯 부른다. 그 소리에 응하듯 재빨리 뛰어와 택시에 올랐다. 멀리에서 볼 땐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60대가 훌쩍 넘어 보인다.
“기사님, 신우아파트로 가주세요.”
“그럽시다~ 신우.. 아파트라.. 어디보자.... 서초구 거기 맞죠?”
노래라도 흥얼거리듯 말하며 택시에 고정된 휴대폰에서 목적지를 검색한다. 그리고는 이내 택시가 출발했다. 도서관에서 점점 몸이 멀어진다. 갑자기 몸과 마음이 노곤해진다. 잠깐 엎드려서 졸았을 뿐인데 진짜 사고라도 당했던 것처럼 힘들다.
“손님 조금 전에 무슨 일 있으셨나 보네. 누구랑 싸우기라도 했나. 표정이 너무 안 좋아요.”
“아.. 그건 아니고요. 도서관에서 좀 졸았는데 악몽을 꿨나봐요.”
눈을 감을 채로 대답하는데 또 어이없는 웃음이 나온다. 기사는 다시 말을 걸지 않는다. 몇 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다 왔습니다~ 왔어요~ 손님. 기본요금이 나왔네요. 젊은 양반이 이 정도는 걸어 다녀도 될 건데. 허허허허.”
“네~ 잠시만요. 계산을..... 아!”
눈을 떠서 택시 요금을 내려고 보니 집에 지갑을 두고 왔다. 사실 요즘은 어지간한 건 휴대폰으로 결제할 수 있다 보니 지갑을 잘 가지고 다니지도 않았다. 주머니에서 꺼진 휴대폰을 꺼내서 잠시 만지작거리며 앉아 있었다. 택시 기사는 뒷자리에서 우물쭈물하는 나를 멀뚱하게 본다.
“하.. 휴..대폰..이 꺼져 있었네요.. 잠시만요.. 켜서 바로 결제할게요.”
“네~ 네~ 찬찬~히 하셔도 됩니다요. 젊은 사람이야 시간이 아깝지, 나 같은 늙은이는 얼마든지 괜찮아요~”
휴대폰을 켜고 정상적으로 구동될 때까지 반복된 꿈을 떠올려본다. 무슨 일이 생겼다면 벌써 몇 번은 일어났을 시간이다. 도서관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폭발음은 들리지 않는다. 평소처럼 도시의 소음만 나지막이 들린다. 역시 꿈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휴대폰 결제창을 열어서 카드를 골라 확인 후 기사에게 전달했다. 휴대폰을 건네받은 기사는 능숙하게 카드 단말기에 대고 결제 버튼을 눌렀다. 순간 결제 완료 화면이 휴대전화에 뜬다.
“띠링~”
결제 안내 문자가 도착했다. 휴대폰을 돌려받고 결제 내용을 확인하려고 폰 화면을 켰다.
“띠링~ 띠링~ 띠띠띠링”
갑자기 부재중 전화 안내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다. 휴대폰을 켜고 나서 세팅이 완료되고 지금에야 수신된 것 같다. 그런데 오늘은 휴대폰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애써 가라앉힌 불안한 마음을 굳이 키우지 않기로 한다. 택시에서 내려 기사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나를 지옥에서 구출해준 사람인 것처럼 괜히 고맙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안전 운행하세요~”
“아이쿠~ 감사는 무슨 허허 돈 받고 하는 일이니 내가 감사해야지~ 얼굴 펴요. 누가 보면 손님이 나온 도서관이 폭발이라도 한 줄 알겠어.”
“네? 뭐라고요? 잠시만요. 잠시만요!”
택시가 출발하면서 기사가 이상한 얘기를 했다. 내가 손을 들고 몇 번 불러봤지만, 택시는 재빨리 눈앞에서 사라진다. 원래 같았으면 달려가 보기라도 했을텐데, 오늘은 그냥 최대한 아무런 일 없이 지나가게 두기로 했다.
휴대폰을 다시 꺼야지 싶어 주머니에서 꺼재 전원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벨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전원을 끄려던 순간 수신된 전화를 받은 것 같다. 순간 겁이 덜컥 났다. 끊어버릴까. 받을까. 아무 일 없겠지. 있든 없든 오늘은 피해야지. 잠깐 동안 수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여보세요. 저희는 현명한 투자를 돕는 부동산 컨설팅업체 oooo컴퍼니입니다. 요즘 소액으로도 투자하는 분들이 많아지셨잖아요?”
수화기 너머로 여자 상담원의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하..... 진짜 투자 전화였구나. 정수리까지 차오르던 불안감이 한 번에 쑥하고 몸 밖으로 빠져나간다. 대체 내가 이렇게까지 긴장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마음에도 평소엔 귀찮았을 투자 권유 전화가 고맙게 느껴졌다.
“아.. 여보세요.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저는 투자에 관심이 없어요. 제발 이런 전화 하지 말아주세요. 먼저 끊겠습니다.”
“왜....... 왜죠?”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는데 수화기에서 멈칫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문득 상담원에게 내가 너무 몰아붙인 건 아닌가 싶었다. 아무런 문제 없는 하루를 보내려면 억지 사과라도 하고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안하다고 말하려 다시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왜죠.. 왜 그냥 갔나요. 이두용씨... 지금 다시 돌아오세요.”
“딸깍”
휴대폰을 든 채로 몸이 굳어버렸다. 식은땀이 흐르면서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벌벌벌 떨린다. 이게 무슨 일이지. 또 꿈인가. 잘못 들은 건가. 꿈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가 아닌데. 빨리 집으로 들어가서 침대에 누웠으면 좋겠다.
“어이~ 이두용씨, 뭘 그렇게나 놀라서 그래요~ 젊은 양반이. 허허허 아직 우린 시작도 안했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좀 전에 내가 타고 왔던 택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내게서 도망치듯 떠나더니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거 같다. 운전석 창문을 내린 기사는 반갑다는 듯 웃으며 얘기한다.
“도서관으로 다시 가야 하죠? 타세요. 요금은 안 받을테니.”
나는 딱딱하게 굳은 몸으로 반항하지도 못하고 귀신에 홀린 듯 택시에 다시 올랐다. 좀 전에 앉았던 뒷자리가 이렇게 불편했나 싶다. 등짝이 아프다.
“이봐요. 이두용씨. 혼란과 공황 속에도 평안과 쉼은 있기 마련이에요. 마음 차분히 가라앉히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택시가 출발했다.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나는 아무런 저항도 말도 할 수 없었다. 차는 천천히 움직이고 기사는 갑자기 음악 볼륨을 크게 높인다. 이 상황에 음악이 들렸을 리 없던 내게도 소리가 크게 들린다.
“볼륨이 크니 시끄럽죠? 허허허 근데 이 음악은 또 얼마나 잔잔합니까? 잘 들으세요. 바흐의 ‘나를 기쁘게 하는 건 단지 사냥뿐이다’라는 작품입니다.”
(J.S. Bach : Was mir behagt, ist nur die muntre Jagd)
“바흐..... 나를.. 기쁘게 하는 건..”
“쾅~! 콰광~~”
순간 택시 뒤편에서 폭발음이 들리더니 뒷좌석이 수직으로 들리며 화염이 솟아올랐다. 잔잔한 음악과 강렬한 불꽃, 폭발과 함께 허공을 구르는 택시.. 슬로우모션의 한 장면처럼 느릿하다. 그때 몸에 불이 붙은 채 뒤를 돌아보는 택시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웃는다. 분명히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