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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Sep 05. 2018

13_마음을 정화하는 삶*

하와이 편

하와이에서 반년, 

중미에서 한달, 서촌에서 반년.

어느 생계형 직장인이

1년간 놀면서 되찾은

77가지 삶 이야기.




오아후 매직 아일랜드(Magic Island)


저녁을 먹은 후 도서관에서 빌린 만화책과 핸드폰을 주섬주섬 챙겨 밖으로 나갑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팝송을 들으며 운하를 따라 걷습니다. 네다섯 곡 정도 듣다 보면 어느덧 매직 아일랜드에 도착합니다. 이름처럼 마법 같은 곳이지요. 


매직 아일랜드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 같은 공원입니다. 매트를 깔아놓고 혼자 요가하는 여자, 나무 위에 걸어 놓은 해먹에서 낮잠을 자는 남자, 바다를 향해 놓여있는 벤치에 앉아 파도를 감상하는 노인, 그 앞을 몇 바퀴째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 아주머니, 집에서 싸 온 푸짐한 도시락을 먹는 가족, 예쁜 뷰를 찾아 사진을 찍는 커플, 번갈아 가며 다이빙을 하는 아이들. 서로가 서로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각자 원하는 것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아주 적당한 크기의 공원이지요. 관광객들에게 인기 많은 와이키키 해변과 알라모아나 쇼핑센터 가까이에 위치해 있지만 그들에겐 없는 차분함, 고유의 평화로움을 독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파크’보다는 ‘아일랜드’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리지요. 


보통 저는 해 질 무렵보다 한 시간 일찍 이곳에 옵니다. 한낮의 태양이 달궈 놓은 따뜻한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바다와 마주 보지요. 그리고는 플레이되고 있는 멜로디를 속으로 흥얼거리며 가져온 책을 가방에서 꺼냅니다. 오늘 꼭 다 읽고 내일 도서관에 반납해야지, 그렇게 생각하고서요. 하지만 책을 두세 페이지도 넘기지 못한 채 그냥 덮고 맙니다. 음악을 중간에 끄고 맙니다.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말지요. 하루 이틀이 아니에요. 파도의 움직임과 그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소리에 정신이 팔려 방금까지 하고 있던 걸 그만두고 맙니다. 그게 행동이든 생각이든 전부 다요.  


파도는 힘껏 밀려오다가 잔잔히 사라져 가고, 다 사라지기도 전에 다시 힘껏 밀려오면서 일정한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그 리듬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뭐랄까 마음의 기복도 서서히 일정해지는 느낌이랄까요. 엄마 품에 안긴 갓난아이가 엄마의 심장박동 소리에 차차 안정감을 되찾는 것처럼, 어떤 기분을 가지고 이곳에 왔든 집으로 돌아갈 때의 마음은 한결 안정돼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별일 없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하와이에서 집을 구하는 문제로 마음이 심란했을 때도, 정든 친구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외로움이 기습했을 때도, 배려심 없는 집주인에게 시달렸을 때도, 하와이를 떠나기 전날 밤에도, 저의 걸음은 자꾸 이곳을 향했지요. 



파도 소리를 듣다 보면 머리 위에 떠 있던 태양이 차츰차츰 눈앞의 바다 쪽으로 이동해 주변 세상을 온통 제 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합니다. 해가 바다에 가까워질 때마다 초 단위로 달라지는 하늘과 구름, 바다의 컬러. 그 석양의 퍼레이드를 넋을 잃고 보지요. 어떤 날의 석양은 베토벤의 운명교향곡같이 웅장하고 어떤 날의 석양은 오로라같이 황홀합니다. 그날그날의 석양은 항상 다른 생김새를 가지고 있어서 오늘은 또 어떤 모습일까, 하는 기대감이 저녁을 먹고 나면 곧장 눕고 싶어 하는 몸뚱이를 쉬이 일으켜 세웠지요. 


해가 바다에 완전히 잠긴 후에도 석양은 한참을 더 하늘에 머물다가 물러갑니다. 마침내 까만 밤이 찾아오고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모호해지면 하나둘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지요. 하지만 저는 자리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합니다. 방금 본 영화의 여운이 가시질 않아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가도록 좌석을 떠나지 못하는 관객이 되고 맙니다. 


되짚어보면 한자리에서 오랫동안 석양을 본 적이 그전에는 없었습니다. 행여 퇴근길에 예쁜 석양을 보게 되더라도 휴대폰으로 찰칵 찍는 그 1초가 끝이었습니다. 석양이 무슨 대수라고요. 1분이라도 빨리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는 게, 가면서 업데이트된 웹툰을 보는 게 대수라면 대수였지요. 새벽 늦게까지 야근하고 들어온 날은 어떻고요. 왠지 일만 하다 하루를 끝내는 게 억울해서 고작 한다는 일이 텔레비전을 켜는 거였습니다. 재미도 없는 화면을 기어코 몇 시간씩 꾸역꾸역 보다가 잠들었지요. 바빴건 한가했건 저의 일상 속에 자연이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없었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하와이에서 한국으로 가져가고 싶은 걸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선택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바람이 나뭇잎을 악기 삼아 어떤 소리를 만들어내는지 귀 기울일 수 있는 마음. 창틀 아래쯤 걸려 있던 보름달이 조금씩 위로 이동해 창틀 밖으로 사라지는 행보를 감상할 수 있는 마음. 그런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고 제 삶에 내어줄 수 있는 마음. 하와이에서 찾은 그 소중한 마음가짐을 가져가고 싶습니다. 하와이를 떠나도, 어느 곳에 있어도 그 소중한 마음가짐으로 오늘 주어진 하루를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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