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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Jan 04. 2019

25_유의미한 삶*

하와이 편

하와이에서  반년,

중미에서 한달, 서촌에서 반년.

어느 생계형 직장인이

1년간 놀면서 되찾은

77가지 삶 이야기.





첫 사랑, 첫 키스, 첫 배낭여행, 첫 월급, 첫 자동차. ‘처음’은 우리에게 특별한 기억을 안겨줍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수많은 도넛을 먹었지만 제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도넛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2000년도 중반에 안양롯데백화점 지하 매장에서 처음 먹었던 크리스피크림도넛. 당시에는 매장 앞에 줄을 서면 갓 나온 따끈따끈한 오리지널 도넛을 한 개씩 공짜로 주었답니다(항상 줄이 엄청나게 길었습니). 뭐 공짜라니까 저와 친구도 긴 줄에 합류했지요.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어 간신히 손에 넣은 도넛을 한입 문 순간, 미처 씹기도 전에 도넛의 일부가 혀에서 사르르 더니 순식간에 입안 가득 퍼지는 달달함. 그건요, 아는 맛도 먹어본 맛도 아니었습니다. 그 낯선 식감과 놀라운 맛에 어찌나 감동했던지요. 요새는 어제 점심으로 뭘 먹었는지도 가물물한데, 십 수년 전에 먹었던 크리스피크림도만큼은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날 그 매장의 공기까지도요.


예전에 이런 궁금증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왜 '지금의 1년''어릴 때의 1년' 보다 훨씬 짧게 느껴질까? 이를 명쾌하게 밝혀낸 이론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아이의 인생이 어른의 인생보다 긴 까닭은 어릴 적엔 처음 보고 처음 느끼고 처음 먹고 처음 경험해보는 것들이 많기 때문일 거라고.  


무언가에 익숙해지면 우리는 더이상 그것을 의식하지 않게 됩니다.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지요. 의미가 없으니 금세 까먹게 되고요. 까먹게 되면 그것은 없던 것과 마찬가지처럼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어른의 인생엔 없던 것과 마찬가지인 날들이 많은 게 아닐까요. 없던 것과 마찬가지인 날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어른의 1년은 365일이 아닌 137일 혹은 82일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요.


하와이에서 반년을 살았습니다. 회사를 다녔다면 상반기 인사고가에서 하반기 인사고가로 넘어가는 시간 정도로 느꼈겠지요. 하지만 저의 6개월이 다른 때보다 길고 풍부했던 건 하와이에서 행했던 대부분의 것들이 처음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서핑을 하고 은하수를 보는 특별한 일상 뿐만 아니라 은행 계좌를 열고 도서관 카드를 만들고 버스를 타고 요리를 하는, 그동안 무신경하게 행했던 일상까지 낯선 이곳에선 의식을 갖게 되고, 기억할 만한 의미있는 일이 되었던 거지요. 단 하루도 버릴 게 없던 나날. 그 소중한 기억은 어느 힘든 날에 불쑥 떠올라 위로가 되고 어느 평범한 날에 불쑥 떠올라 그리움이 되겠지요. 영원히 잊혀지지 않은 채 말이에요.


매일 아침 나를 깨우던 하와이의 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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