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 때조기졸업을 목표로 무리하게 많은 학점을 신청한 적이 있습니다. 재수를 했기 때문에 뒤쳐진 1년을 빨리 좁혀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하지만 야심과 달리 아무리 밤을 지새워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전공 과제들에 치여 생애 가장 우울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결국 3학년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휴학을 했고, 결과적으로 1년 앞서가려다 1년 더 뒤처진 꼴이 돼버렸지요.
휴학이 준 12달의 유예기간 중 10달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데 썼습니다.
처음 일한 곳은 문을 열면 동아리방에 온 것 같은 10평 남짓의 아늑한 음반가게. 바닥의 무늬가 거의 사라진 걸 보면 예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길 오고 갔는지 짐작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제가 일했던 2000년 대 중반에는 음악 듣는 수단이 CD플레이어에서 MP3플레이어로 넘어갈 즈음이라 하루에 손님이 열명이라도 오면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손님보다는 친구들 방문이 더 잦았지요. 이곳에서 홀로 오전 10시에 문을 열고 오후 10시에 문을 닫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라디오 DJ처럼 오늘은 어떤 곡을 틀까? 고민하는 게 주된 일과였지요. 애석하게도 세 달 뒤 저의 아지트는 MP3의 아성을 버텨내지 못하고 영원히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일한 곳은 안양 일번가의 터줏대감 서점.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문학 코너의 캐셔가 되었습니다. 북적북적한 위층 문제집 코너에 비해 아래층 문학 코너는 한산하기 그지없어서 겨우 며칠 만에 자주 오는 손님들 얼굴을 외우게 되었고 몇 주 후엔 그 손님들이 좋아하는 책 성향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몇 주 더 지나서는 거스름 돈을 받으면 위인의 얼굴을 모두 앞면으로 가도록 맞춘 후 지갑에 넣는 어느 손님의 금전 습관까지 꿰뚫게 되었지요.
일을 곧잘 하던 알바생은 캐셔용 에이프런을 벗고 서점 문 밖을 나서면 본래의 휴학생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여러 불안들이 공격해왔지요. 지금 이렇게 전공과 무관한 아르바이트나 할 때냐고. 누구는 디자인 회사에서 인턴을 하고, 누구는 보스턴으로 어학연수를 갔고, 누구는 유럽으로 여행을 갔다던데 너는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냐고.
하루는 알바를 마치고 집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서 마지막 정거장에서 내렸습니다. 검정 올스타 스니커즈를 신고 눈앞에 보이는 수리산을 오르기 시작했지요.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 나뭇가지를 갓 뚫고 나온 여린 연둣빛들, 그 사이로 영롱하게 비치는 초여름 햇살들,그리고 점차 거칠어져 가는 숨소리. 오르면 오를수록 불안을 가동시키는 생각의 전원이 꺼졌고, 마음에 부유하고 있던 잡념들마저 잘게 부서져 땀구멍으로 배출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날 이후 알바가 끝나면 생각을 멈추기 위해 산으로 갔고 등산은 취미라 부를 수 있는 저의 첫 유흥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10번의 월급날이 지나갔습니다. 번 돈의 대부분은 고스란히 생활비에 보태졌고, 그중 일부분으로 한 달간 배낭여행을 떠났습니다. 2006년 12월, 스물세 살에 혼자 인도로.
왜 인도였을까?
기차가 수시로 연착돼도 조급해하지 않는 나라, 가난이 수치가 되지 않는 나라, 시간을 돈에 비유하지 않는 나라. 저는 그런 인도에 설레었습니다. 파리도 로마도 아닌 꼭 인도여야 했지요.오천 원짜리 배낭을 메고, 가고 싶은 도시들 페이지만 대충 접어놓은 가이드북만 들고선 정말 대책 없이 떠났습니다. 스마트폰도 구글맵도 없던 그 시절에말이죠.
더 심각한 건 영어였어요. 당시 딜레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으니까요. 경유지인 방콕 공항에서 전광판을 보는데 제가 타야 할 델리행 항공편 옆에 delay라는 단어가 뜨는 겁니다. 그 뜻을 모르니 티켓에 적혀있는 출발 시간만 재차 확인하는 거지요. 와야 할 시간에 오지 않는 비행기를 8시간 동안 얼마나 초조하게 기다렸는지,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의 좋은 예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다음 날 추레한 몰골로 인도에 도착했습니다. 준비성은 없지만 인복 하나는 있어서 저와 비슷한 사람 네 명을 우연히 한인 식당에서 만났습니다. 다들 한국이 아닌 다른 땅을 밟아본 게 처음이었고, 그 나라가 바로 인도였고, 그곳에 캐리어가 아닌 배낭가방을 들고 왔고, 또 혼자 왔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죽이 꽤 잘 맞았습니다. 모든 게 처음이라 인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지요. 인도의 기차와 유럽의 기차를 비교하지 않았고 인도의 게스트하우스와 일본의 게스트 하우스를 비교하지 않았으며 인도의 길거리 음식과 대만의 길거리 음식을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인도는 그냥 인도였고 그 자체로 사랑스럽고 소중했지요. 한 달 간의 여행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저는 미뤄두었던 3학년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났습니다.
20대에 속해 있을 땐 재수를 하고 휴학을 하고 취업준비를 하던 그 시절이 저의 아픈 손가락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 시절에 꿈꿨던 카피라이터가 되어 회사-집-회사-집 생활만 하다 보니 생각지 못한 것에서 안도감이 들더군요. 만약 재수하기 싫어서 스무 살에 그림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만약 제때 졸업하려고 휴학을 하지 않았다면, 만약 그 많은 알바들을 하지 않았다면, 만약 그때 인도에 가지 않았다면, 만약 공채에 불합격이 되지 않았다면, 만약 잠시 멈추고 쉬고 뒤처지지 않았다면,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지금 내 인생, 얼마나 교만하고 나약하고 지루했을까. 1학년이 끝나면 2학년으로, 2학년이 끝나면 3학년으로 올라가듯 당연하게 살지 않아다행이다.
조금의 망설임없이 퇴직을 하고 아무 연고도 없는 하와이에 혼자 갈 수 있게 용기를 준 건 가족의 격려나 친구들의 응원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안정된 직장을 찾을 수 있을까? 다시 직장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다시 카피를 잘 쓸 수 있을까? 그 고민의 답을 재수생이던 스무 살의 제가, 휴학생이던 스물세 살의 제가, 취준생이던 스물여섯 살의 제가 주었지요. 그까짓 1년은 너의 앞날에 지장이 될 정도로 그리 길고 대단한 시간이 아니라고. 남은 인생에 두고두고 힘이 될 정도, 딱 그 정도의 시간일 뿐이라고.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에게서 용기를 얻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습니다. 언젠가 어느 날에, 망설이고 머뭇거리는 미래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새로운 용기를 줄 거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