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군가의 '덕후'였던 적이 있는가?
사실 나는 '덕후'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덕후'란 무엇인가?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이러하다.
<일본어 오타쿠御宅)를 한국식으로 발음한 ‘오덕후’의 준말이다. 오타쿠의 의미로도 사용되지만, 어떤 분야에 몰두해 마니아 이상의 열정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쓰인다.>
일본어에서 유래된 말이라 한때는 '덕후'라는 표현을 쓰지 말자는 의견도 간혹 있었던 걸로 안다. 나 역시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마니아'라는 말은 절대 '덕후'라는 말을 대체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됐다.위 오픈 사전 속 의미처럼 '덕후'에는 '마니아' 이상의 열정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덕후, 덕질'에 이어 '성덕(성공한 덕후)'라는 표현도 일상에서는 자주 사용되는 것은 물론 미디어에서도 자주 노출된다.
그런 덕후가 하는 행위를 '덕질'이라 말한다. '덕질'은 사전적으로 어떻게 정의되는가?
우리말샘에 의하면 '어떤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여 그와 관련된 것들을 모으거나 파고드는 일'을 뜻한다. 여기서 '파고드는 일'이라는 표현이 참 흥미롭지 않은가? 물리적으로 어딘가를 가지 않아도, 그저 좋아하는 대상을 떠올리는 것, 좋아하는 대상의 굿즈를 모으는 것, 좋아하는 대상은 그 공간에 없더라도 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카페 이벤트를 여는 것 등등 덕질의 세계는 그 범위가 아주 넓다.
누군가는 만화를, 누군가를 드라마나 영화를, 누군가는 연극과 뮤지컬을, 누군가는 연예인을, 누군가는 캐릭터를 덕질한다. 이런 단순한 예시 외에도 운동화, 건담, 레고 수집 등 각자의 마음이 향하는 곳에 깊이 몰두해 있다면, 끝없이 파고들고 있다면 그것을 덕질이라 부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덕질' 또한 분명하게 사랑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타인과 직접적인 교류를 하며 나누는 사랑과는 차이가 있기에 더 흥미롭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네가 보고싶을 때 직접 볼 수도 없고, 네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뭐하러 그렇게 시간과 돈을 쓰니?" 이에 대해서는 굉장히 명료한 대답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설령 훗날 나의 마음이 모두 증발해 버려 이 순간을 후회한다 해도, 지금 이 순간 나는 '덕질'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영화와 드라마를 너무 좋아하던 나는 평일이면 학교에 가기 전 아침 드라마를 보고, 집에 와서는 케이블tv에서 하는 드라마 재방송을 보고, 저녁 시간대에 하던 ebs 청소년 드라마(특히 <깡순이>를 좋아했다)를 보고, 저녁 8시 일일 드라마를 거쳐 10시를 기다렸다. 10시가 미니시리즈 드라마의 메인 타임이었기에 내게는 가장 가슴 떨리는 순간이었다. 그 시절엔 ott가 존재하지도 않았고, 인터넷으로 다시보기도 힘들었으니 본방을 챙겨보는 게 중요했다.
키가 작았음에도, 조금이라도 더 일찍 자서 나의 성장에 이바지를 했어야 함에도, 나는 드라마를 포기할 수 없었다. 60분짜리 드라마가 꼭 밤 11시에 끝나는 건 아니었다. 방송사들은 앞다투어 편성 경쟁을 했고 조금이라도 더 인기를 얻기 위해 드라마 방송 시간을 늘렸다. 게다가 인기 있는 드라마일수록 앞 광고가 많이 붙었기에 10시 정각에 시작하는 드라마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11시 30분쯤 되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키가 작은 걸까? (키 성장에는 유전이 가장 요인이라는 기사를 많이 봤기에 절대 드라마 때문이 아니라고 내 자신을 타일러 본다)
내 스스로를 대중문화 덕후라 여기며, 드라마와 영화 그리고 배우에 대해서는 많이 알았어도 어릴 적부터 가요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음악 방송을 챙겨보긴 했지만 왜 소녀들이 그토록 아이돌에게 열광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남성들은 당시 나의 또래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일반 여자 친구들 대부분이 하루만 네 방의 침대가 되고 싶다고 외치는 미소년들을 너무 사랑해 매일을 울부짖고 팬픽을 찾아 읽었다.
한창 해체설이 퍼져 5-1=0이라며 친구들이 동방신기 때문에 우는 동안 나는 이렇게 장난치곤 했다. "5-1=4지 어떻게 0이야?" 그러면 친구들은 울다가 화를 내곤 했다. (미안하다, 친구들아 그 순간엔 내가 너무 T였다) 그런 내가 서른이 되었을 때 케이팝 아이돌에게 완전히 꽂혀 버렸다. 10대에도, 하물며 20대에도 하지 않던, 아니 아이돌에겐 눈길 한 번 간 적 없던 내가 아이돌 덕질을 이제야 시작하게 된 것이다. 평생을 덕후로 살아왔지만 지금 하는 아이돌 덕질은 정말 신세계였다.
10대, 20대가 주 팬층인 아이돌 덕질판에서 30대 이상은 드문 편이다. 30대 이상의 팬들은 스스로를 자칭 할미팬, 이모팬이라 부르기도 한다. 현실에서는 아직 젊지만 덕질판에서는 우스갯소리로 늙은 편에 속하는 것이다. 나처럼 아이돌 덕질을 늦게 시작한 이들에게 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이돌 덕질에 입문한 (아주 조금) 늙은이를 위한 소소한 안내서가 되길 바라며 글을 이어나가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