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고 의사소통을 하다

외국어로 대화하는 부부들이 서로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by 즐겨찾기

독일 생활 초기의 마음가짐과 달리 새로운 언어에 대한 열정이 시들해졌다. 독일어가 어렵기도 했거니와 1-2년 배워서는 쉽게 늘지 않을 거라는 자괴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읽고 해석하는 건 비교적 빨리 늘었으나 듣기와 말하기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독일어 공부를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다.


거기에는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독일어를 잘해서 의사소통이 능숙해진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마트에서 삼겹살을 사고, 어린이집 선생님으로부터 준비물을 전해 듣고, 대학원 동료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는 것 같이 생활에 필요한 대화들은 기초적인 독일어나 영어만으로 충분했다. 다시 말해, 독일어를 잘하지 못해도 일상생활을 함에 있어 불편한 점이 별로 없었다.


반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 이상의 대화를 위해서는 독일어(뿐만 아니라 영어)를 쓸 일이 없었다. 섬세한 감정을 나눈다거나 열띤 토론을 하는 데에 외국어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외국인과 그런 대화를 나눌 만한 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대화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만 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한 가지 의아하게 느꼈던 것은,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대화하는 커플이 주변에 제법 많다는 것이었다. 어학원의 같은 반 학생이었던 브라질 출신 아주머니는 독일인과 결혼해서 살고 있는데, 아주머니는 포르투갈어가 모국어이고 스페인어를 조금 할 줄 알았다. 남편은 독일어가 모국어이고 스페인어와 영어를 조금 할 줄 알았다. 남편이 브라질에 교환학생을 왔다가 사귀게 되어 결혼까지 이르렀다는데, 지금까지 20년 정도 살았음에도 서로 상대방의 모국어를 잘하지 못해서 외국어인 스페인어로 이야기한다고 했다.


이런 커플은 꽤 흔하게 찾을 수 있었다. 어학원의 또 다른 학생은 터키 사람이고 그녀의 남편은 독일 사람인데 둘은 서로 잘 못하는 프랑스어로 대화를 나눈다. 첫째 아이의 초등학교 같은 반 친구의 엄마는 태국인이고, 아빠는 아르메니아인이다. 이들은 파리에서 만났는데, 그나마 서로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영어로 이야기를 한다.


지금까지 나는 언어란 것이 인간의 사고방식은 물론이고 가치관까지 결정할 정도로 영향력이 크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 면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면 서로 이해하기 쉽지 않고, 깊은 대화를 나누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다. 언어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져서 결혼하고 같이 살아가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싶었다. 내가 결혼을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한국어를 쓰는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고,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외국 여자를 만나서 외국어로 말하면서 살 수 있으리란 것은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언어가 다른 커플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무슨 이야기를 어느 정도로 하며, 서로의 감정을 어느 만큼이나 공유할 수 있을까. 나는 대만 사람과 결혼한 한국인 K의 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K는 뉴질랜드에서 공부하던 중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학업을 마친 뒤 결혼을 했다. 그 당시 K 부부는 독일에 온 지 6개월 정도 되었는데, 우리 가족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였다. K 부부는 영어로 서로 대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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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국에서 유행한다는, K의 부모님이 결혼 선물로 마련해 준 최신식 불판에 고기를 구워 먹으며 저녁을 보냈다. 나는 K의 아내에게도 말을 걸며 대화를 하려고 했으나 아무래도 K와 말하는 게 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한두 잔의 술을 마신 뒤 K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내 분과는 얘기가 잘 되나요?”

나의 질문에 불분명한 점이 있었음에도 K는 그 의도를 쉽사리 파악하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죠.”

“그럼 어떻게 하나요? 뭔가 얘기하고 싶은데 잘 전달이 안 될 수도 있잖아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죠. 오히려 그게 편할 때도 있어요.”


한 번은 벨기에에 사는 한국인 J 씨 부부의 집에서 조지라는 사람과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다. 조지는 호리호리한 몸에 키가 매우 크고 듬성듬성한 머리칼과 작고 길쭉한 얼굴을 가진 백인이었다. 반면에 그 집에 걸려 있는(J 씨 부부는 집주인인 조지로부터 가구들이 다 갖춰진 집을 임대해서 살고 있었다) 사진에 나타난 그의 부인은 키가 작고 살집이 있는 흑인이었다. 알고 보니 집주인 조지는 네덜란드인이고 그 아내는 카메룬인이었다. 조지의 말에 따르면 아내는 프랑스어가 모국어이고 영어는 잘하지 못하는데, 둘은 어쩔 수 없이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


조지에게 물었다. 그는 영어를 비교적 잘했다.

“조지, 아내 분과 이야기하기 어렵지 않나요?”

“오우, 우린 별로 이야기 안 해요.”

조지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얘기를 안 해요?”

“우리는 각자 자기 할 일을 해요.”

조지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외국어로 대화하는 부부들을 보면서, 실제로 그런 부부들이 제법 많은 데다가 꽤 잘 살고 있음을 보면서, 이전과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물론 그들이 어떻게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긴 하다). 어쩌면 상대방을 이해하고 의사소통을 하는 데 있어서 언어란 것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지 않을까.


어떤 사람과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눌 때 그의 표정, 옷차림, 태도를 보고 편안함이나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지, 그가 하는 말의 내용은 그보다 더 적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대화가 필수적인 게 아니라 그 밖의 것, 예를 들어, 애정 있는 표정과 행동, 양보와 배려, 비슷하거나 양립 가능한 가치관이 더 필요한 게 아닐까. 우리가 말을 통해서 상대방을 이해했다거나 이해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은 어쩌면 커다란 착각이 아닐까.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이 말을 하면서도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언어가 다르면 오히려 덜 상처 받지 않을까.


서로 익숙하지 않은 외국어를 쓰는 부부들을 보면서, 상대방의 생각이나 마음을 짐작하려고 애쓰는 태도와 노력이 ‘말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상태’를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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