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즐겨찾기 Jan 15. 2019

여행이 즐겁지 않은 까닭은(1/2) - 자동차로 스페인

여행은 우리의 삶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즐거운 것은 아니다.

 크리스마스 휴가를 맞아 자동차로 스페인 여행을 다녀왔다. 16박 17일 동안 4개국, 10개의 도시를 거쳐 대략 4,600km를 이동한 장거리 여행이었다. 이전에도 자동차로 오랜 기간 여행을 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이번만큼 여러 도시를 거쳐 긴 거리를 이동한 것은 처음이었다.     


 어디에도 소속된 곳이 없는 나의 유럽 생활은 불가피한 사유가 있을 경우 내일 당장이라도 끝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떠날 때면 언제나 그것이 마지막 여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번에는 특히 비자 연장 인터뷰와 월세 기간 만료를 앞두고 있었기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그렇다 보니 평소보다 조금 무리하게 많은 도시를 다녔다.     


 프랑스의 작은 도시인 콜마르(Colmar)에서의 1박으로 시작하여 스위스의 로잔(Lausanne) 2박, 프랑스의 카르카송(Carcassonne) 2박, 스페인의 사라고사(Zaragoza) 2박, 톨레도(Toledo) 2박, 마드리드(Madrid) 3박, 도노스티아(Donostia) 1박, 다시 프랑스의 푸아티에(Poitiers) 1박, 트로아(Troyes) 1박, 그리고 룩셈부르크 1박이 여행의 일정이었다. 마드리드까지 가는 길에는 평균 2박씩 하면서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길에는 1박씩 하면서 올라온 셈이다.     


 여행은 즐겁게 시작되었다. 콜마르는 이전에도 가본 적이 있었는데, 오직 크리스마스 마켓을 보기 위한 목적으로 들렸다. 콜마르는 유럽에서 가장 크리스마스 마켓이 아름다운 도시들 중 하나로 꼽혔다. 조금 늦은 시간에 도착해서인지 마켓은 거의 끝나 있었지만 동화 같은 도시의 분위기는 밤에도 여전했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있어서인지 골목의 작은 식당들에도 손님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사람들은 식당 안의 따뜻한 노란색 조명 아래서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창 밖에 있는 우리들에게까지도 그들의 안락한 행복함이 전해졌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콜마르의 거리

 로잔은 원래 제네바를 가려고 했던 것을 숙박비가 비싸서 바꾼 것이었는데,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레만 호수와 그 뒤에 웅장하게 솟아있는 알프스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곳에 간 충분하고도 넘치는 이유가 되었다(로잔의 선착장에서 마주 보이는 곳은 생수로 유명한 프랑스의 에비앙이다). 로잔에 도착한 첫날에는 하루 종일 가는 비가 내리기는 했지만 그것마저 기분 좋은 우울함을 더해 주었고, 알프스 중턱에 걸려 있는 비구름 사이를 뚫고, 밝고 환한 빛이 쏟아지는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숭고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로잔의 선착장에서 바라본 비 오는 날의 레만 호수와 알프스

 이렇게 여행이 즐겁게 느껴졌던 것은 내가 여행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에 어느 정도 기인하였다. 나는 학창 시절이나 연수원 시절에도 절대로 예습은 할 수 없는 유형의 인간이었는데, 여행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행 갈 장소에 대한 선택은 전적으로 동선과 이동거리, 아내의 기호 혹은 다른 사람의 추천과 숙박비에 의하여 결정된다. 따라서 여행지에 도착하기 전에 나는 그 장소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다. 몇 번 예습을 시도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글이나 사진으로 보는 것은 실제와 너무나 달랐기에 별 소용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직접 눈으로 보고 발을 디뎌야만 어떤 것을 보고 무엇을 할지 알 수 있었다.     


 기대감을 가진 것이 오히려 여행에 악영향을 미친 경우도 있었다. 카르카송에서 그랬다. 카르카송은 보드게임에도 나오는 유명한 성곽도시라는 지인의 추천을 받아 여행 장소로 결정된 곳이었는데, 첫인상이 좋지 않았다. 외벽에 페인트칠을 하지 않고 시멘트 색깔을 그대로 노출시킨 집들이 즐비했고, 지붕 위의 기와들은 녹슨 채 방치되어 있었다. 남프랑스임에도 풍요로움과 짙은 원색이 보이지 않는, 생각보다 훨씬 우중충한 분위기였다. 언덕 위에 있는 성곽 역시 웅장하긴 했지만 그리 아름답게 느껴지지는 않았고, 곳곳에서 진행되는 보수 공사로 건설 장비들이 여기저기서 시선과 발걸음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내가 그곳에 가기 전에 나름대로 상상했던 이미지가 있었기에 실제의 카르카송이 초라하게 느껴진 것 같았다. 다시 말해 카르카송이 안 좋았다는 게 아니라 유명한 성곽도시라는 지인의 말에 나도 모르게 너무 큰 기대감을 가졌다는 것이다. 아내가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많이 관광하는 도시들 중 하나라고 말한 것은 그런 기대감을 더욱 증폭시켰을 것이다. 여행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적 중의 하나는 기대감이다.


 다행히도 카르카송에 이틀을 머물면서 기대감을 지우고 실제 그 도시의 매력에 눈을 떴다. 아마 도착한 다음 날 바로 떠났으면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한 장소의 매력을 발견하기 위해서 하루나 이틀은 너무나 짧은 기간이다.


 밝고 화창한 다음날 다시 올라간 고성은 굉장한 규모에 중세 분위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성곽 아래로 보이는 도시의 집들도 전날보다 훨씬 편안하게 느껴졌다. 오후쯤 되니 카르카송의 우중충한 색깔의 건물들에서 따뜻함과 왠지 모를 다정함을 느꼈다. 티 내지 않고 꾸미지 않은 듯 멋스러운 것이 프랑스만의 매력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작은 가게에 놓인 조그만 물건 하나하나에도 획일화되지 않은 고유의 멋을 담아낸 것이 그들의 문화인 듯했다.    

시내로 향하는 다리 위에서 바라본 카르카송의 성벽

 여행은 아라곤 왕국의 수도였던 사라고사와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였던 톨레도까지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사라고사와 톨레도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도시였지만 모두 환상적이었다. 두 도시의 밤거리는 연말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거리마다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었고 음식은 값싸고 맛있었다.   

사라고사의 대성당

 여행 역시 우리의 삶과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즐거울 수만은 없는 법이다. 추락의 신호는 자동차 바닥이 긁히는 소리였다. 아니, 어쩌면 도심에서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택시를 부르지 않고 걸어간 게 잘못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언덕길을 빙빙 돌아 걸었더니 아침부터 진이 빠졌다. 주차장에 도착한 후 톨레도 주변에 있는 전망대를 향했다.


 몸이 지쳐서인지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게 정상적인 길을 벗어났고, 자동차는 잘 정비되지 않아 파여 있는 구덩이에 빠졌다. 나는 그 구덩이에서 나오려고 3-4번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자동차 바닥을 심하게 긁었다. 그 격렬한 소리는 마치 내 뼈를 긁는 것 같았다. 자동차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으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주차장에서 올라가는 길에 본 톨레도

  그 이후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톨레도에서 가고 싶은 식당이 있었는데, 떠나는 날까지 포함해서 3번을 찾아갔으나 언제나 문이 닫혀 있었다. 아마도 휴가를 떠난 것 같았는데, 가게 문에 안내문이라도 붙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발걸음을 돌려서 찾아간 다른 식당은 이제 곧 문을 닫는다면서 우리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곳은 관광지를 벗어난 지역이라 근처에 다른 식당이 없었고, 마음이 상한 우리는 점심도 먹지 않고 마드리드로 향했다.    

  

 마드리드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실망한 도시였다. 나와 아내는 정확히 10년 전에 마드리드에 온 적이 있다. 그때와 달리 너무 상업화된 분위기와 비싼 물가,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로 기분이 점점 다운되었다. 저녁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나온 것은 냉동된 음식을 전자레인지로 데운 것이었는데 그마저도 맛이 없었다. 나와 아내는 점심을 거의 먹지 않았음에도 식사를 남겼고 아이들 역시 거의 입에 데지 않았다. 우버 택시 운전자는 2.8km의 거리를 20분 동안 빙빙 돌아 8.5km를 달렸다. 우리는 택시를 부를 때 예상된 4유로보다 두 배 많은 8유로를 지불해야 했다. 뭐라고 따질까 싶기도 했지만 괜히 기분만 더 상할 것 같았다. 8 유로면 독일에서 정상적으로 계산해서 지불할 금액보다 적은 것이라면서 위안 삼았다.      


 우리는 마드리드에서의 하루를 세고비아(Segovia) 관광에 할애했고, 결과적으로 그건 매우 바람직한 선택이었다. 거의 2000년 전에 지어졌다는 게 조금도 믿기지 않는 건축물인 수도교를 보면서 기분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날은 12월 31일이었는데, 마드리드로 돌아와 한결 나아진 마음으로 새해맞이 불꽃놀이를 감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완전히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몸과 마음은 지쳐 있었고 여전히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세고비아의 수도교

 여행 역시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삶의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여행의 기쁨을 얻기는 쉽지 않다. 안전이나 음식, 휴식과 수면에 대한 최소한의 만족감이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즐거운 여행을 하기는 어렵다. 적어도 그런 상태에서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즐거운 여행을 하기는 어렵다. 물론 여행지에서 겪는 초조와 불안, 여러 가지 역경과 고난 역시 여행의 일부이고, 그것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많다는 얘기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조금도 예상하거나 기대하지 못한 고난은 단기적인 관점에서 여행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이번 여행에서 겪은 최악의 어려움은 도노스티아에서 있었던 일이다. 사실 이번 여행이 이전과 가장 크게 달랐던 점은 아이들이 차에서 한 번도 잠을 자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조금 더 체력이 강해졌고 밤마다 10시간씩 잠을 잤고 차 안에서  장난치느라 그랬을 것이다. 가뜩이나 이번 여행은 이동거리가 가장 길었던 데다가, 아이들이 자동차에서 잠을 자지 않다 보니 나와 아내는 조금씩 지쳤던 것 같다.(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낯선 곳에서 다른 삶을 꿈꾸다 - 시에나, 생폴드방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