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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겨찾기 Jan 30. 2019

여행을 해야만 볼 수 있는 것 - 토스카나

어떤 말이나 예술로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토스카나가 그랬다.

“토스카나? 그래, 좋지.”

 아내에게 이렇게 대답을 했지만, 토스카나가 어디인지 정확히 몰랐다. 이탈리아의 어디쯤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구글 지도에서 토스카나를 찾아보니 영어로는 투스카니(Tuscany)였고 지도의 목적지는 피렌체에 표시되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토스카나가 피렌체 근처의 어디쯤인 줄 알았다.     


 그렇게 지난여름 여행의 목적지가 정해졌다. 아내가 중학교 때부터 토스카나에 가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하니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달리 뚜렷하게 가고 싶은 곳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 구체적인 계획을 정하다가 토스카나는 이탈리아의 한 주였고, 피렌체는 토스카나의 주도임을 알게 되었다.

     

 여행할 도시와 숙소를 물색한 끝에 최종 목적지는 몬테풀치아노(Montepulciano)로 정했다. 독일의 주요 도시들과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를 살짝 거친 후 이탈리아에서 10박을 하는 것이 우리가 세운 계획이었다. 그중 토스카나 지방에서는 몬테풀치아노에서 3박, 피렌체 남동쪽 1시간 거리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3박을 하기로 했다.     

 

 몬테풀치아노에 가기 전의 목적지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인 베로나(Verona)였다.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을 지나 베로나로 가는 길은 생각지 못한 탄성을 불러일으켰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멋진 자동차 길을 지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알프스 산맥을 통과하여 베로나 북부까지 이어진 그 길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햇살은 한결같이 따뜻하고 부드러웠고, 산은 높고 하얗던 것이 점점 낮아지면서 눈부시게 푸르러졌다.


 산은 낮아지면서도 여전히 산맥의 줄기를 품고 있어서 거칠고 단단했다. 완만한 내리막길이 한참 동안 이어지는 도로의 좌우로 웅장한 암벽과 절경이 나타났고, 벼랑 끝에는 이탈리아스럽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교회와 성벽이 세워져 있었다. 시간만 있었다면 10km마다 10분씩 쉬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풍경은 이 길을 지나간 사람만이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부근 고속도로에서 본 이탈리아

 베로나 근교에서 3박을 한 뒤 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몬테풀치아노로 향했다. 궁금한 마음에 아내에게 물었다.

 “토스카나는 뭐가 그렇게 좋대?”

 “글쎄 그냥 가보면 알 거야. 말로 설명하기 힘들어.”

 “뭐가 유명한데?”

 “토스카나에 관한 사진 본 적 없어? 언덕과 평원들 말이야.”     


 나는 토스카나에 관한 어떤 사진도 본 적이 없었기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아는 토스카나는 영화 <레터스 투 줄리엣>에서 주인공들이 할머니의 첫사랑을 찾는 곳의 배경이 된 지역 정도였다. 오직 그 영화에서 본 이미지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아주 흐릿한 기억에 불과했지만.

     

 몬테풀치아노로 가는 길에 시에나(Siena)에 들렸고, 몬테풀치아노에 머물면서 피엔자(Pienza)와 몬탈치노(Montalcino)에 다녀왔다. 피렌체 방향으로 올라가는 날에는 조금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산 지미냐노(San Gimignano)를 거쳤다. 우리는 4일 동안 토스카나의 언덕과 평원과 좁은 길들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어떤 때는 아무런 목적지 없이 마음에 드는 방향 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아득한 평원이 너무나 아름답고 평화롭게 느껴질 때면 자동차에서 잠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토스카나에 있는 내내 깊은 물속에 잠긴 듯 먹먹해져 그곳을 바라보며 눈에 담는 것 외에 다른 일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앞에서 나는 ‘아득한’ 평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토스카나의 발도르차(Val d’Orcia) 평원과 그 주변이 우리가 생각하는 ‘아득한’ 것과는 다르다. ‘아득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보이는 것이나 들리는 것이 희미하고 매우 멀다.”라는 것인데, 토스카나가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곳은 눈에 보이는 것이 뚜렷하고 가깝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토스카나에서 본 것에 대해 글을 써보려고 했지만 내 능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었다. 토스카나에 다녀온 뒤 꽤 오랫동안 아무런 글을 쓰지 못했다. 내가 가진 언어와 표현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말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밖에 없었다.

몬테풀치아노
토스카나,  정확히 어딘지 모르겠음

 그렇다고 사진이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유럽 여러 나라의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들은 실제 내가 본 것과 조금이나마 비슷한 느낌이 났다. 그럭저럭 만족할 수 있는 사진도 나왔다. 하지만 토스카나는 그렇지 않았다. 토스카나의 평원을 다니면서 나를 비롯한 일행은 그곳을 사진 찍으려 노력했지만 언제나 실패했다. 우리가 가장 많이 반복한 말은 “사진이 잘 안 나오네.”였다. 눈으로 보면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 사진을 찍으면 특유의 고유함이 사라지고 평범해졌다.


 물론 우리의 사진 기술이 부족하고 사진기 역시 좋은 것이 아니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구글이나 네이버에서 발도르차 평원이나 토스카나의 사진을 찾아봐도 내가 눈으로 본 것의 느낌을 비슷하게라도 살려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어떤 것은 녹음만 가득했고, 어떤 것은 사이프러스 길만 강조되었고, 어떤 것은 언덕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또 어떤 것은 너무 아득했다. 무엇보다 사진기의 작은 화면만으로는 토스카나의 넓고 굴곡진 풍요로운 땅과 하늘 전부를 담을 수 없었다.


아내가 중학교 때부터 토스카나에 가려는 꿈을 키워 온 것은 그 당시 절친했던 친구 덕분이었다. 그 친구는 어린 시절을 독일에서 보냈는데, 유럽에 살면서 여행 가본 곳 중에 토스카나가 가장 좋았다고 말했다. 아내 역시 친구에게 뭐가 그리 좋은지를 물었고, 친구 역시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면서 가보면 안다고만 대답했다. 그곳에 가봐야지만 알 수 있는 거라고. 세상에는 여행을 해야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때로는 예술이 어떤 것에 대한 이미지를 거의 완벽하게 재현하는 역할을 한다. 사진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남프랑스의 니스에서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로 가는 길에는 생트 빅투아르(Sainte-Victoire)라는 산맥이 있었다. A8번 고속도로를 타고 가면 반드시 볼 수밖에 없는 하얗고 높은 산맥이었다. 생트 빅투아르는 산맥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어울리게 거의 굴곡 없이 연속되어 장벽처럼 세워져 있었다. 산맥이 하얀 것은 눈이 쌓인 것이 아니라 암석의 빛깔인 듯했다. 이 산맥은 고속도로와 수평으로 길게 뻗어 있어서 꽤 오랫동안 볼 수 있었다.

      

 인상 깊게 남긴 했지만, 토스카나에서의 경험으로 이것 역시 기억 속에서만 남아 있겠구나, 단념했다. 엑상프로방스의 한 아틀리에에서 폴 세잔이 그린 생트 빅투아르를 발견할 때까지 그랬다. 그 그림은 세잔의 다른 그림에 비해서 유명한 것도 아니고 높은 평가를 받는 것도 아닌데, 내가 그 산맥을 보면서 느낀 강렬한 인상을 포착하고 있었다. 그 그림이 실제의 모습을 그대로 그렸다고는 할 수 없음에도 사진보다 더 실제와 닮아 있었다. 고흐의 많은 그림들이 남프랑스의 작열하는 아름다움을 표현해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발도르차 평원과 토스카나는 예술 작품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웠다. 나는 아직까지 내가 그곳에서 보고 느낀 것을 재현한 예술 작품은 보지 못했다. 이 글을 쓰면서 인터넷에서 사진과 그림을 찾아보았는데 그것들은 오히려 도식화된 느낌마저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모습일 뿐 실제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적어도 한두 개의 단편적인 이미지만으로 토스카나의 모든 공간과 색깔을 채울 수 없었다. 인터넷에서 본 이미지들이 내 머릿속의 기억을 꾸며내고 어지럽게 해서, 찾는 것을 그만두고 조용히 기억을 떠올렸다. 눈앞에 그려진 듯한 모습은 아니어도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것은 직접 가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몬테풀치아노

 때로는 어떤 하나의 이미지가 힘이 되기도 한다.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없어도 단 하나의 장면에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 윌리엄 워즈워스는 이를 '시간의 점'이라고 표현했다. 자연 속의 어떤 장면들은 우리와 함께 평생 지속되며, 그 장면이 우리의 의식을 찾아올 때마다 현재의 어려움과는 반대되는 그 모습에서 우리는 해방감을 맞보게 된다는 것이다(알랭드 보통 <여행의 기술>, 210쪽). 토스카나는 나에게 '시간의 점'과 같은 장소이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지금처럼 여유롭게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일상에 치일 것이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주말 부부를 하게 되면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는 날도 많을 것이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한다. 힘들고 지친 날 혼자 있는 것은 더 싫어한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괜찮을 것 같다. 그런 날에도 마음속의 토스카나를 불러내어 그 풍경에 기대 쉴 수 있을 것 같다. 토스카나는 나에게 그런 장소가 되었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미소 지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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