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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겨찾기 Mar 07. 2019

시민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 뤼벡

진정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시민성을 사랑해야 한다.

  지난 3월 초 연휴가 있어 4박 5일의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목적지는 북부 독일의 뤼벡(Lübeck)과 함부르크(Hamburg)였다. 이전까지 여행의 목적지는 아내의 의견에 따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이번만은 전적으로 나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특히 뤼벡은 전부터 꼭 가고 싶었던 도시였다. 그곳이 소설가 토마스 만의 고향이자, 그의 여러 소설들의 배경이 된 도시이기 때문이었다.      


 2년 전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라는 작품을 처음 읽었다. 주인공인 토니오 크뢰거는 시민성을 나타내는 아버지와 예술성을 나타내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다. 아버지는 명상적인 파란 눈을 하고 세심하게 옷을 입은 훤칠한 신사이고, 어머니는 남국에서 온 피아노 연주를 즐기는 검은 머리의 정열적인 여인이다. 


 어머니를 닮아 예술가의 기질을 타고난 소년 토니오 크뢰거는 시를 쓴다. 외모 역시 어머니를 닮아 이국적이다. 그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사물들에 마음을 쓰고, 다른 소년들 사이에서 서먹함만을 느낀다. 건전한 평범성을 갖춘 학생들, 올바르고 즐겁고 순박하게 규칙과 질서에 맞게 살아가는 시민들을 동경한다. 그는 “길을 잃고 예술의 길로 접어든 시민”이다.    

뤼벡의 도심으로 들어가는 길에 있는 홀스텐 성문의 모습

 전체 9개의 장으로 구성된 <토니오 크뢰거> 중에서 뤼벡을 배경으로 한 것은 1, 2장과 6장이다. 1, 2장은 어린 시절의 토니오 크뢰거를 그린다. 그는 고향 마을인 뤼벡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사랑한다. 그들은 토니오 크뢰거가 동경하는 시민성의 상징이다. 3장에서 토니오는 고향인 뤼벡을 떠나 예술가들의 도시인 뮌헨으로 간다. 


 6장은 뮌헨에서 성공한 소설가가 된 토니오가 고향 마을인 뤼벡을 다시 찾는 내용이다. 그는 그리움에 젖어 고향 마을을 방문하지만, 선량한 시민인 경찰관은 그를 도주 중인 수배자로 오해해 체포하려 한다. 그는 자신이 평범한 시민임을 증명하려고 하지만 그것을 보여줄 신분증이 없다. 


 간신히 상황을 모면한 그는 서둘러 뤼벡을 떠난다. 이처럼 <토니오 크뢰거>에서 뤼벡은 시민성의 상징인 도시이자, 그가 동경하였지만 머물 수 없었던 곳이다.      


 북부 독일의 작은 도시인 뤼벡의 첫인상은 깔끔했다. 거리는 넓고 단정했으며 사람들은 친절했다. 과거 경제적으로 번영했던 도시인만큼 고급 주택가가 넓게 펼쳐져 있었지만, 지난날의 영광을 잃은 사람들의 행색은 검소했다. 


 시내로 통하는 길에는 빨간 벽돌로 지어진 “유서 깊고 땅딸막한” 홀스텐 성문과 지금은 고급 상점들로 변한 소금 창고들이 정갈하게 서 있었다. 도심의 거리는 화려하지 않지만 옛 모습이 잘 보전된 “높다랗고 뾰족한 첨탑들이 여러 겹의 고딕식 아치를 이룬” 건물들이 즐비했다. - 이하의 따옴표(",  ")가 되어 있는 문구는 <토니오 크뢰거>에 나오는 표현이다.  


 나는 소설 속 주인공처럼 물레방아 둑길과 홀스텐 성문 쪽의 둑길을 걸었다. “합각 머리 지붕들이 늘어선 작은 골목들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북해에서) 눅눅한 바람이 불어왔다.”    

도심을 둘러싼 트라베 강의 모습

 아내의 배려로 혼자서 토마스 만의 생가를 찾았다. 그의 첫 장편 소설의 제목을 따서 ‘부덴브루크 하우스(Buddenbrookhaus)’라고 불리는 곳이다. 토마스 만의 아버지는 큰 곡물상을 물려받은 대상인으로 뤼벡의 2인자(시장이 1인자)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생가는 겉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컸다. 북부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정면의 폭은 좁지만 내부는 길고 깊은 형태의 집이었다. 


 1층(독일식으로 0층)에는 그의 연보와 일대기가 설명되어 있었는데, 절반 이상을 꼼꼼히 읽었다(영어가 병기되어 있다).


 특히 흥미를 끈 것은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였다. <토니오 크뢰거>에 나오는 내용은 소설이 아니라 그의 어린 시절 자체였다. 소설에는 단지 ‘남국’이라고 나오지만 그의 어머니는 독일인과 포르투갈 계 브라질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다. 사진 속 그녀의 모습은 한눈에 보아도 북부 유럽인들과는 다른 이국적인 풍모였다. 


 뤼벡은 시민성으로 대표되었다. 남국 출신인 어머니의 예술성을 물려받은 토마스 만은 뤼벡에 살면서 시민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끊임 없이 갈등했다. 성실한 시민인 그의 아버지는 토마스 만이 100년도 넘게 선대로부터 이어져 온 가업을 물려받을 의지와 재능이 없음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토마스 만의 생가인 부덴브루크하우스

  토마스 만처럼 소설 속 주인공인 토니오 크뢰거 역시 타고난 예술가이다. 그는 예술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감정, 따뜻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은 언제나 진부하고 쓸모없는 것입니다. 예술적인 것은 단지 우리들(예술가)의 타락한, 우리들의 기예적인 신경조직의 불안 초조감과 냉철한 황홀경일 따름입니다.” 


“(예술적)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인간적 빈곤화와 황폐화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건강하고도 힘찬 감정은 몰취미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술가가 인간이 되고 느끼기 시작하면 그는 끝장입니다.”     

 

 하지만 토니오 크뢰거는 동시에 정직하고 평범한 시민성을 동경한다. “정상적이고 단정하고 사랑스러운 것”, “악의 없고 단순하며 생동하는 것”으로 상징되는 시민적인 삶을 사랑한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그가 동경하지만 손에 넣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세계에도 안주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약간 견디기가 어렵지요. 당신들 예술가들은 저를 시민이라 부르고, 또 시민들은 나를 체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이 소설을 좋아하는 많은 이들은 아마도 토마스 만이나 토니오 크뢰거처럼 예술성과 시민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규칙과 질서에 맞게 살아가는 진짜 시민들은 예술가를 동경하지 않는다. 반면 진정한 예술가적 기질을 지닌 사람들은 시민적인 삶을 꿈꾸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이분법이 절대적으로 타당한 것은 아니다. 누구나 예술성과 시민성을 조금씩 가지고 있다. 그러나 토니오 크뢰거의 견해에 따르면, 예술성과 시민성은 전혀 다른 두 가지 성질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양자를 동시에 구현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시민이다. 그것도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시민이다. 올바르고 즐겁고 순박하게, 규칙과 질서에 맞게 살아간다. 


 하지만 나는 예술가의 삶을 동경한다. “유희적이고도 냉담한 우월성”을 지닌 사람들, “말해야 할 내용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지 않고 그 내용을 위해 심장이 너무 따뜻하게 뛰지 않는” 사람들의 삶을 동경한다. 시민이라면 예술가의 삶을 꿈꾸지 않을 것이기에 나는 순수한 시민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동시에 예술가적인 삶에 무관심한, 삶의 다른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진정한 시민들을 동경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면서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존경한다. 모순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나는 두 가지 삶을 모두 사랑한다. 예술가를 동경하면서도 진정한 시민이 되고픈 시민이다.

전망대에서 본 홀스텐 성문과 뤼벡 시내의 모습

  뤼벡의 모든 거리는 반듯하고 쾌적했다. 오래전에 만들어진 도시임에도 비좁고 굽은 길이 없었다. 도심을 아우르는 트라베 강 둘레의 산책로 역시 단정하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니더레거(Niederegger)라는 가게에 들러 뤼벡의 특산품인 마자판(Mazapan, 으깬 아몬드와 설탕, 달걀흰자로 만든 말랑말랑한 과자)을 먹었다. 한국인들 입맛에는 맞지 않다는 평이 많지만 나는 굉장히 좋아한다. 특히 마트가 아닌, 오래된 도시의 전통 있는 제과점에서 파는 것은 한 끼 식사를 훌륭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디저트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도심에 있는 상트 페트리(St. Petri) 교회 전망대에 올랐다. 뾰족한 첨탑의 전망대에는 사진 기사 한 사람만이 자리를 지켰다. 그는 도시에 어둠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망대에서 도시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우리는 해가 완전히 지기를 기다려 도시의 야경을 본 후 전망대에서 내려왔다. 뤼벡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시민들의 도시였고 나는 그런 뤼벡이 마음에 들었다.   


 토니오 크뢰거는 자신의 내부에 깊게 뿌리 박힌 시민성으로 갈등하면서도 그런 자신의 모습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는 말한다. 


“세련되고 상궤를 벗어난 것, 악마적인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그것에 깊이 열중하는 자는 아직 예술가라 할 수 없다. 악의 없고 단순하며 생동하는 것에 대한 동경을 모르는 자, 인간적인 행복에 대한 동경을 모르는 자는 아직 예술가가 아니다.” 


“난 그들(예술가들)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 문사(文士)를 진정한 시인으로 만들 수 있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적인 것, 생동하는 것, 일상적인 것에 대한 나의 이러한 시민적 사랑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시민성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같은 말을 하고 싶다. 한 사람의 직업인을 진정한 시민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름답고 관능적인 것, 태만하고 정열적인 것, 충동적이고 방종한 것, 보헤미안적인 것”에 대한 예술가적 사랑이다. 이러한 마음에는 “우울한 질투와 아주 조금의 경멸과 완전하고도 순결한 천상적 행복감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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