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구김살이 있는 사람이 좋다. 흔히 말하는 햇살캐, 항상 웃고 있고 따뜻함을 전하는 사람들보다는, 햇살캐와는 결이 다른 이들에게 마음이 간다. 밝고 해사한 모습으로 주변을 환히 비추는 이들이 아니라, 구석진 응지에 기대 선 채 빛을 응시하는 사람들. 사회성을 익히고 상처를 품은 채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들. 여기서 중요한 건 ‘일정한 사회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이다. 자기 삶이 힘들다고 타인을 해치고 부적절한 행동을 합리화하는 사람은 그냥 존나 별로다. 그런 건 자기 변명에 불과하다. 이 글을 우연치않게 읽고 ‘와 ㅅㅂ 이거 존나 내 얘기넼ㅋㅋ’라고 생각하는 인셀러가 있다면 걍 꺼지라는 뜻이다.
햇살캐가 사람들과 어울려 웃고 있을 때 그 뒤에서 조용히 조소를 흘리는 사람들. 눈에 띄진 않지만 속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과연 니들이 언제까지 웃을 수 있을까.’. 그 말이 저주라기보단 일종의 생존 방식처럼 느껴질 때, 나는 그들이 이미 자기 자신의 불길을 어느 정도는 진화시킨 사람들이라는 걸 알게 된다. 누가 나를 해쳤든, 내가 나를 해쳤든, 혹은 내가 누군가를 해쳤든—그 어떤 방식으로든 흉터 하나쯤은 달고 있는 사람.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알고 그걸 단념할 줄 아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을 ‘구김살이 있다’고 표현한다.
예전엔 구김살 없는 사람들 앞에서 자주 주눅이 들었다. 그들은 내가 갖지 못한 것들을 너무도 당연하게 가진 사람들이었다. 태생적인 무해함. 밝고 따뜻하고, 사랑받으며 자라왔고, 지금은 힘들어도 언젠가는 잘 될 거라고 믿는 사람들. 그런 믿음에 보답하는 환경들. 이상하게도 그런 사람들은 약삭빠르다기보단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남들로부터 이용당하고 쉽게 흔들리는 쪽은 늘 인상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다.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있으면 더 찌푸려졌다고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구김살 있는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면서 일종의 훈련을 받는다. 표정, 말투, 태도 같은 걸 조절해가며 나쁘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는 연기를 생활화한다. 덕분에 그냥저냥 사람들과도 무난하게 지내는 방법을 안다. 그리고 묘하게도 우리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마치 외장 마감재를 뚫고 내부의 구김살을 읽어내듯이. 웃고 있어도 눈은 웃고 있지 않거나, 말하는 와중에도 미묘한 침묵이 흐르거나. 그런 순간에 우리는 같은 주파수를 공유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 대체로 말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