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있는 너희는 누구?

담담히 글을 그리다

by 태은

글을 읽으면서 나는 생각한다.

다른 글로 옮겨가며 읽는 사이 먼저 읽은 것에 대해 모두 다 까마득히 잊힐지라도,

그것들은 어느새 나를 이루는 나의 체세포가 되었다가 내가 필요할 때마다 저절로

손끝에 묻혀 나오기를





머릿속에서 온갖 문장들이 앞 다투며 내게 말을 걸어온다.

그것들은 빛 좋은 날 동시에 터진 하얀 벚꽃같이 눈부시게 아름답고, 여름을 치달으며 깊어진

단풍 같고, 고요히 시간을 견디는 겨울 고목과도 같다.

그것들은 모든 단어와 단어들을 움직여 스스로 배열되고 조화를 이루며 빠르게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그리고 동시다발로 시끌벅적하게 살아 움직이며 나를 이끌고 과거와 현재와 미지의

온 세계를 탐방한다.


나는 너무나 황홀하여 그대로 붙잡으려 하지만 그것들은 어느새 신기루가 되어 순식간에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아뿔싸! 나는 사라진 그것들을 되새김하기 위해 조그마한 회색 뇌세포를 들쑤셔보지만 두 번 다시 기억은 나지 않는다. 허무하게도 나의 손길은 마치 꿈속의 무언가를 잡으려던 것처럼 공허해지고, 마음은 가졌던 것을 잃은 것처럼 아쉬움에 미련을 떤다.


뻗치던 손을 내리고 돌아서려는 찰나 내 눈앞에서 사라졌던 문장들이 다시 나타났다.

다시 나타난 그것들은 스스로를 움직여 형체를 갖추고 각자의 역할을 하느라 분주하다.

하나인 듯 하지만 다양한 세계, 거기서 움직이는 가지가지 군상들!

잘생긴 놈, 혹은 못생기고 허접한 놈, 여린 놈, 까칠한 놈, 도덕군자가 있는가 하면 철딱서니 없는

흰머리 할망구가 있고 드센 아줌마에 풀 죽은 청년들도 있다. 이 다양한 캐릭터들은 날마다 때마다

바뀌면서 나타나 머릿속을 휘젓고 다닌다.


나는 눈이 돌아갈 것 같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흔들어 대니 또 다른 군상들이 나타나 자리를

대신한다.


이번에는 온갖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악의적인 존재들과 그걸 막으려는 사람들, 또는 쫓는 사람들이다. 또한 삶의 비참함을 가까스로 견뎌가는 젊음이나 늙음, 학대받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어느 순간 그 아이와 모든 사람들이 성공자의 모습으로 내 눈앞에 서 있기도 한다. 이들은 이보다 더 많은 이들과 섞여 두서없이 떠들거나 행동하고, 변론하고 연설하고 때론 강연한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수없이 바뀌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또 다른 나이다. 나의 자아, 끝없이 글을 쓰고 싶어 하지만 쓰지 못하는 내가 만들어낸 허상들이다.


잠 속에서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잠을 자는 나와 내 잠 속에서 내가 잠들지 못하게 시끄럽게 살아가는 그들. 그들은 연이어 나타나 하나의 시리즈가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끌고 온 것이 마치 짜깁기한 퀼트 같다.

그리고 말도 안 되게 황당하다.

나처럼 말하는 사람 아닌 것들, 그것이 내가 아는 말인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소통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 아닌 것들이 해괴해도, 현실에 없는 것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이 구분되어 있지도 않다.


((야자수처럼 키가 큰 계란이 열리는 나무가 있다. 그 나무는 몸통부터 가지, 줄기, 그리고 가지 끝에 달린 계란까지 투명하다. 투명해서 수액이 오르내리는 것과 계란이 수액의 영양 공급을 받으며 점점 자라는 것까지 다 볼 수 있다.))


((침대 옆 벽이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따라 물고기들이 걸어 나왔다. 아마 대 여섯 마리는 되나 보다. 그들은 하나같이 몸에 비해 커다랗고 다양한 얼굴들을 한 채 시끄럽게 떠들면서 나온다.(아마 생선회를 맛있게 먹었던 날인지도 모른다.ㅠ) 그들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언어를 사용하지만 나는 그들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있다.

저희들끼리 한참이나 수다 떨더니 갑자기 나 보고 여행 가자고 한다.

'내가 너희 같은 것들하고 왜 여행 다니니?'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의당 가야 한다는 생각을 동시에 한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여행을 간다. 걸어 걸어서.

걸어서 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나하고 같이 있는 새 한 마리 때문이다. 그 새는 말을 할 수는 있지만 고소공포증 때문에 날 수가 없다.

새가 고소공포증으로 날 수가 없다니! 어쨌든 그 새는 내 어깨 위에만 올려놔도 기절을 한다. 그래서 느린 물고기와 날지 못하는 새와 어진이와 내가 나란히 일렬로 줄을 맞춰 여행길에 나선다. 그리고

그날 난 블록버스터급 모험을 했다.))


꿈속에서, 내가 꿈을 꾸는 내게 말한다.

‘아무리 꿈이지만 너무 황당하다. 황당하지만 재미있는 걸!’

‘잘 꾸미면 재미있는 글이 되겠다. ㅋㅋ 이 꿈 잊지 마. 절대 잊지 마.’

그리고 조심스럽게 눈을 뜬다. 조금이라도 바스락대고 움직임을 크게 하면 잊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수십 년 습관처럼 마시던 아침 커피도 생략해야지.

꿈 한 자락 붙들고 잠이 다 떨궈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컴퓨터를 켜고 기다린다.

오래된 컴퓨터가 윙윙 거리며 낡은 소리를 냈다. 마침내 커서가 동그라미를 그리며 바쁘게 시동 걸던 소리를 멈추자 나는 한글 문서를 연다.

그곳에 깜빡거리며 작대기 커서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하는 표정으로.

착각이겠지만 마치 빙긋 웃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잘 떠지지 않는 눈으로 나도 화답의 미소를 지은 것 같기도 하다. 커서님과 눈을 마주치면서. "안녕?"

그런데 그 순간 의식할 새도 없이 내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깜빡이는 커서가 내 눈과 마주치는 그 순간, 사실 '안녕'이란 말이 내 입에서 채 떨어지기도 전에,

리셋!!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나마 희미하게 남은 것들은 마치 아교로 붙여 놓은 것처럼 덩어리로 뭉쳐 뭐가 뭔지 모르게 뒤엉켜버렸다.

위의 것만 아물거리게 남은 채.


한시도 머릿속이 조용할 날이 없다. 시끄러운 그것들은 세상 밖으로 내보내 달라고 늘 아우성이었다. 나도 그러고 싶다. 비워내서 한 순간만이라도 조용히 멍한 상태가 되어보고 싶다. 그러려고 하얀 문서창을 열고 앉지만 커서가 껌뻑이는 것을 보는 순간 머릿속 세상의 시끄러운 것들은 모두가 사라져 버리거나 뒤죽박죽 뒤엉켜 버린다.

이런 일이 어제오늘의 일도, 하루 이틀의 일도 아니니 더 실망할 것은 없다.

해서 나도 커서처럼 눈만 껌뻑거리다 일어나 커피 물을 올린다.


글 쓰는 건 엉덩이를 의자에 질기게 붙들어 매는 일이라 했다.

나도 그러고 싶다. 엉덩이에 종기가 날 때까지 앉아서 글을 써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허나 이미 비워진 머리를 어깨에 두른 채 오래 앉아 있는다고 될 일인가.

그저 냉장고의 물을 꺼내 마시며 침대에서 일찍 기어 나온 걸 억울해할 밖에.


이런 연유로 나에게 있어 글쓰기는 불안과 두려움이다. 잡고 싶지만 절대 잡히지 않아서 끝없이 갈망하게 하는... 2015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