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살자

담담히 글을 그리다.

by 태은


살면서 일어났던 그 어떠한 상황보다 더 나를 힘들게 한 것은 그 상황에 대한 생각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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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의 콧잔등을 지지하는 다리 하나가 부러졌다. 안경이 없으면 눈앞의 책도 읽지 못하는 나는
비뚜름하니 기울어진 안경을 그대로 쓴 채 일을 보고 있다. 부지런한 이 같으면 벌써 안경집으로 달려갔을 텐데. 몸이 생각보다 게으르다.
몸을 움직이게 하는 건 생각이다. 그런데 안경점을 생각하며 ‘가야 한다’와 ‘나중에’라는 생각을
동시에 해대니 게으른 몸은 ‘나중에’를 선택한다.
작고 예쁜 뇌세포가 ‘생각’이라는 걸 하기 전에 벌써 몸을 움직였어야 했다. 하지만 그다지 큰일은 아니니 개의치 않기로 한다.


모든 것들이 나로부터 떠난다. 사람들이 떠나고, 일이 떠났다. 손에 들고 다니던 것들은 잃어버리고, 부서지고 망가져서 떠나기도 했다. 어떤 일이나 사람들한테서는 내가 떠났고, 어떤 물건들은 내가 버렸다. 그렇게 늘 샘샘이다. 그래도 인생이란 더하고 빼기하면 남는 것이 있다는데, 하다못해 어떤 의미라도 남아야 하는데 나는 제로다. 제로 만들기 게임을 한 것도 아닌데.



마지막으로 마지막에 세웠던 계획을 떠나보냈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무수히 쌓았던 계획이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 진 것이 없었다. 나아가기는커녕, 계획을 세우느라 끄적인 종이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계획은 비틀어지고 오그라들었다. 왜 그럴까. 나와 목적은 서로 합이 맞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전략이 잘못돼서인가. 덕분에 내 앞에는 다양하고 퀄리티 높은 실패 경험들이 풍부하게 쌓여갔다.
하기야 계획대로 되었다면 지금쯤은 (몰디브의 어느 해안가에 앉아 포도주를 기울이고 있었겠지).
이렇게 좁은 방에 앉아 글 푸념하는 대신.
아주 우아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상상이라도 해 보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이제는 그것도 식상한
일이다
그냥 살자.
계획 같은 건 하늘에 계신 하느님, 부처님, 저 우주님이 알아서 하시라하고.
올지 말지 모를 미래에 매달리느라 소중한 나의 오늘 ‘지금’을 놓치지 말고.
생각 속에서 생각 따위에 휘둘리지 말고.


영하 25°를 넘나드는 날씨에도 봉정암과 오세암, 백담사를 이웃집 드나들 듯 가볍게 다니던 이가 있었다.

건장한 체격에 큰 얼굴을 가진 사십 대의 그는 말씨도 행동도 늘 푸근했다. 진지하면서도 겸손했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세심했다. 게다가 아주 긍정적이었다.

혹시, 불법(佛法)과 같이하는 생활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영향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러나 가르침은 오직 타인을 교훈하는 데만 사용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곳 또한 그곳이다 보니.


‘이 험한 길을, 그것도 하루에 몇 번씩이나 오가는 거예요? 왜요? 가능해요, 그게?’

‘가능하죠 뭐, 일이 있으니까 가고 오는 거고.’

"힘 안 들어요?"

"힘 들죠. 그런데 그런 생각 안 합니다. 그냥 하는 거죠." 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봉정암에서 산을 타고 와 백담사로 내려가던 중 눈보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붙들렸을 때였다.


따뜻한 종무소 마룻바닥에 앉으면 창밖의 눈보라 치는 광경은 마치 스크린의 풍경처럼 멀게 느껴진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했던가, 그도 발이 묶인 김에 진하게 내린 커피를 마시며 한참이나 이런저런 살아가는 얘기들을 했다. 그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말이 있다. 그의 이름이나 다른 건 생각나지 않지만

푸근했던 미소와 함께.


“아침에 눈 뜨면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이 생길까!‘하고 기대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내가 갈 곳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좋고.” 아, 커피 맛있네요. 하면서 그가 덧붙였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보냅니다. 세 군데 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훌륭하지만, 그래도 내가 가야 하는 일들이 사방에서 터집니다. 해결하고 터지고 또 해결하고, 그렇게 바쁘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저녁에는

파김치가 됩니다. 그래도 ’아, 오늘 하루도 잘 살았다!‘하는 생각에 잠이 편해집니다.”


“와~ 가뿐하게, 즐겁고 행복하게 사시네요! ”


“그렇죠 뭐, 사는 게 별건가요. 그냥 사는 거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 무슨 일이 생기든 그 상황 자체에만

신경 씁니다. 괜한 생각이나 감정이 끼어들면 분별심이 일어나 힘들고 일이 꼬이기도 하지만, 그것만

경계하고 있으면 크게 힘든 일도 없어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해서 꽤 쉬워 보이는 그런 삶을 흉내 내보기로 했다. 하지만 눈을 뜨자마자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이 생길까!‘하는 말을 떠올리기도 전에 ' 미치겠네!' 소리가 먼저 터져 나왔다. 밤사이 얼마나 추웠는지 도량 내 모든 곳이 정지된 것처럼 꽁꽁 얼었다. 그걸 알기도 전에 눈뜨자마자 몽롱한 상태로 들어간 화장실에서 미끄덩거리다 세숫대야와 물통들을 넘어뜨리며 요란스레 넘어졌다.


오전 내내 욱신거리는 엉덩이뼈를 조심스레 움직여가며 툴툴거렸고. 점심에 나온 뜨끈한 국이 두어 숟가락

뜨기도 전에 냉장고에서 갓 꺼낸 것처럼 얼어 짜증이 났다. 짜증은 또 다른 짜증 거리를 불러냈다.

어제의 불쾌한 일들이 떠올랐고, 한 달 전과 일 년 전 일과 먼 과거의 일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다. 대부분 좋았던 일보다 불행하거나 불편하거나 불쾌한 일들이었다. 이어서 미래가 나를 끌어당겼다.


내가 생각하는 미래는 늘 희망적이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과거에는 이런 일들을 겪는 오늘이 분명 미래였다. 또한 과거든 최근이든 내가 세웠던 계획 속에는 오늘 일어난 일 같은 건 없었다. 특히 ‘삑사리’는.



그게 무엇이든 오늘 있었던 일들은 살다 보면 일어날 수 있는, 그저 삶의 상황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줄도 모르고 상황에 대한 끊임없는 생각은 상황을 떠나 감정의 폭증을 불러왔다. 불쾌하고 불편하고 짜증나는 일로 만들어 그야말로 ‘마음속은 복잡하고 요란했다.’가 돼버렸다.
그냥 살기로 했다. 단순하게, 삶에서 무엇을 목적하든 서두르지 말고 그렇다고 멈추지도 말고, 불만스럽지만 불평은 그만하고, 저항하지 말고.
온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전체성을 띤 유기적 관계라 했다. 그 관계들이 시절 인연에 따라
엉키고 풀어지기를 반복한다. 지금 내게 일어나는 일들은 필요해서 일어난 것이고, 쓰임이 다 하면
내가 억지를 부려도 나한테서 떠날 것이다. 버리든 버려지든, 그렇다고 그것이 나쁘거나 좋은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냥 그럴 뿐인것이니까.


자꾸 한쪽으로 기우는 안경 때문에 목도 따라 한 쪽으로 기울어진다.

게으른 몸은 아직도 안경집으로 달려갈 생각이 없는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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