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고 있는 제주의 이야기
지금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새벽종이 울렸네~’라는 노래로 온 마을 사람들의 새벽잠을 집단으로 깨우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그곳엔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300여 호도 안되는 집들이 넓게 자리 잡았고, 구불거리는 올레가
그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집과 집들을 연결했다. 그리고 시골 대부분의 집이 그러하듯 그곳도 집과 집들 사이에 귤밭과 마당을 끼고 있었다. 한 번도 그래 본적은 없지만, 위에서 보면 마치 큰 기둥을 중심으로 가지들이 뻗어있고, 그 가지는 작은 가지들로 연결되며 끝에 열매들을 매단 것 같은 형국의 조그만 동네였다.
비가 오면 물이 철철 흘러넘치는 작은 냇가가 무심히 마을 옆을 지나가고, 축축 처지는 더운 날엔 오가는
사람들에게 그늘을 내주는 거대한 팽나무가 있는 곳이다.
네 집과 내 집 사이에는 어린아이 키에도 미치지 않는 높이로 돌담들이 이어져 있었다. 무언가를 막을
정도로 높지 않은, 그저 구역을 구분하는 용도에 불과한 그 돌담들의 표면에는 숨을 쉬어야 하듯 구멍이
숭숭 뚫려있었다.
그때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문이 없었다. 대신 통나무 세 개가 입구에서 주인장의 말을 전해줬다.
사람이 집에 있는지 없는지, 잠시 나갔는지 아니면 긴 외출인지 등등 정낭은 그렇게 주인 만나러 마당까지 들어오는 괜한 수고를 덜어주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마을 안에 자리한 과수원에는 임자를 모르는 무덤들이 자리를 차지한 경우가 많았다. 우리 뒷집이 그러하고 앞집과 옆집의 귤밭에도 임자를 모르는 무덤이 있다. 자기 땅에 있지만
언제부터 있던 것들인지도 모르는 그 무덤들에 대해 사람들은 특별한 경계심을 보이거나 경외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내 소유의 밭 한쪽이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이 조금 아쉬울 뿐, 그저 원래 있던 돌이나 나무 대하듯 무심하다.
산 자와 죽은 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듯한 마을. 그곳은 빌어먹게 가난한 사람도 없고, 조금은 차이가
있을지언정 누구에게나 부러움과 질시를 받을 만큼의 큰 부자도 없었다. 대문 따윈 아랑곳없이 급하면
낮은 담을 넘어 들어가면 되고, 누군가를 찾아가야 할 때 골목길 돌고 돌아가기 싫으면 남의 집 마당을
가로질러 가도 되었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회관은 벽돌과 시멘트로 지어진 아담한 2층 건물이다. 지붕에는 아침마다 우리를
깨우기 위해 일부러 설치한듯한 확성기가 있었고, 창 앞에는 플라타너스가 건물보다 더 높이 뻗어 올라가 작은 바람에도 깃발처럼 잎을 흔들어댔다.
시간 날 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놀 수 있는 넓은 마당이 있었으며, 마당 한쪽에는 마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비료나 농기구와 상여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 그리고 그 창고 한쪽을 터서 만든 마을의 유일한 이발소가 큰길을 향해 나 있었다.
그 이발소에는 농번기 때를 제외하고는 늘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머리를 깎든 안 깎든.
큰길과 회관 마당 사이에는 경계를 짓느라 길게 벚꽃을 심었고, 그 나무들이 자라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러자 사람들은 흔하디흔한 크고 작은 돌을 모아 벚꽃을 따라 넓고 길게 돌을 쌓았다. 마당에서 보면 야트막하고, 도로에서 보면 살짝 높은 성곽 같은 돌담이다. 성곽 위는 자잘한 돌멩이로 평평하게 골라
반듯하게 만들었다.
그곳은 이제 짐을 지고 오가는 사람들의 쉼팡이 되고, 한가해지면 바둑이며 장기를 두는 이들과 술상을
옆에 두고 훈수 두느라 열심인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돌멩이 하나 없이 평평한 회관 앞 넓은 마당은 조그만 진동에도 흙먼지가 풀풀 날린다. 그런 마당 한쪽에는 농구 골대가 세워져 있고, 가운데는 배구 네트를 연결 할 수 있도록 양쪽에 철대 기둥이 세워져 있다.
이른 아침, 잠시 잠깐 시끌벅적하던 마을은 이내 조용해졌다가 오후가 들면서는 다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꼬맹이들이 농구 골대를 기준 삼아 자치기를 하고, 그 아이들이 지쳐갈 무렵이면 좀 더 큰아이들이 돌아와 벚나무 그늘에다 책가방을 던져 놓고 골대를 향해 치열하게 공을 던진다.
어스름해지기 시작하면 밭에 나갔던 아버지 어머니들이 돌아온다. 등에는 아침에 잔뜩 지고 갔던 점심과 참 대신 고단함이 가득 들어 찼을 테지. 하지만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이내 하루의 무사함에 감사했을 것이다.
집집마다 저녁밥 짓는 냄새가 무르익었다. 곧이어 자기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들이 회관 마당을 향해 길게 울려 퍼진다. 아이들은 하던 놀이를 멈추고 온통 흙 묻은 몸을 흔들며 소리를 따라 들어간다.
적요해진 마당에 플라타너스가 우두커니 혼자 남았다. 종일 그늘을 만들어 주느라 고단한 하루를 보냈으니 그대도 이제 평안의 시간을 가져보시길.
지금 그 동네는 예전의 모습을 거의 잃었다. 어른과 아이들의 쉼터였던 회관 마당과 성곽같은 돌담은 없어졌고, 거대한 팽나무들도 베어졌다. 도로를 넓히면서 길가의 집들은 다른데로 옮겼고, 구불거리며 이집 저집 연결하던 정겨운 올레는 반듯하고 넓은 도로로 바뀌었다. 그리고 사람들도 바뀌었다.
내가 알고 있던 그 마을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기억 속엔 선명하지만 마치 꿈을 꾸고 난 후처럼 모든 것이 사라진 곳.
바닷가 언덕 위의 조그만 마을에 살던 사람들
그들이 삶을 꾸려가던 집과 수수한 마당과
멍석 위에 펼쳐놓고 까먹던 보말과 소라과 오분자기
화덕 위에서 익어가던 물오른 오징어와 밤 깊은 이야기들
반딧불이가 불을 켜기도 전 와르르 와르르 쏟아져 내리던 별들.
모두가 사라졌다. 삶의 한 시기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끝난 것처럼.
추억을 추스를 틈도 없이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고영애 저 <바람이 모이는 곶(串)>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