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완벽한 위안이 되는..

담담히 글을 그리다

by 태은


빈속에 마시는 방탄커피로 아직도 잠으로 몽롱한 몸을 깨우는 중이다. 커피의 씁쓸한 맛보다 버터의 고소하고 느끼한 맛이 혀끝을 사로잡고 온몸으로 퍼진다. 뱃속이 뜨끈하다. 몸이 달았다. 착 감기던 향이 사라지기 전에 한 번 더 그 뜨거움에 입술을 갖다 댔다.


휴대폰과 연결된 스피커에서 재즈 음악이 낮게 흐르고 있다. 가사가 들려서 따라하게 하는 것 보다 나에겐 그저 소리일 뿐인 음악이 좋다. 특히 흐느적대며 낮게 흐르는 듯한 이 재즈가 좋다.

비가 올 듯 날씨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회색빛 하늘 만큼 방안도 무거워 보이지만 그런대로 좋다. 눈을 감고 있으면 마치 손님 없는 카페에 혼자 앉아 있는 느낌이다.


오래되어 삐걱대는 컴퓨터에서 문서창을 열었다. 하얀 바탕 위에 제목 하나가 쓰여있다. ‘지금’이라고.

머릿속에 구르는 말들을 글로 옮기고 싶어했다. 하지만 시간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글이 되지 못하는

말이 늘어갔다.

‘혹시 내가 쓰고 싶은 것과 제목이 맞지 않는 걸까?’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지만 창을 열 때마다 매번 제목이 바뀌었다. 바뀌는 제목에 따라 문장 한 줄이 생겼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럴수록 쓰고 싶은 욕구는 맹렬해졌다. 반면, 재주가 없으므로 쓰고자 하는 이 욕구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도 맹렬해졌다. 생각과 욕구 사이에서 괴로운 건 나였다.

그러다 문득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내가 쓰려던 것들은 과거의 경험이거나 미래에 대한 바람이나 불안,그것도 아니면 남의 일이었다.

그리고 반드시, 경험에서 우려낸 지혜로운 교훈이나 위로의 글이어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따라서 잘 써야 한다는 압박. 그건 내가 쓴 단어와 문장들이 너무 초라하면 내 삶 전체가 후줄근하게 보일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하나, 좀 그러면 어떤가?' 하는 건 지금 드는 생각이다. 삐까번쩍 살아졌으면 좋았겠지만 후줄근해 보이는 것도 내 인생이니 내가 사랑할 수 밖에. 게다가 지금 쓰는 내용이 '과거'면 어떻고, '미래'면 어떤가. 어차피 쓰는 건 '지금 이 순간'의 내 마음인 것을. 쓰고 있는 지금 이순간이 내 창조의 시간이다.


내가 경험이 많은 건 ‘본의 아니게’다. 원해서라기보다 생에 떠밀리듯 살아온 날이 많았기때문이다. 삶에 단단히 뿌리 내리지 못하고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부유(浮遊)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해서 나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가엾고 아프고 슬프다. 오래 산 만큼, 경험이 많은 만큼 아프고 슬프다. 이런 내가 글로서나마 감히 나 아닌 다른 누굴 위로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지혜나 교훈이나 위로의 글은 나를 위해 쓰려한다. 그런데 위로해야 하는 건 언제의 나일까? 지혜가 필요한 건 언제인가?



설악산 깊은 곳에 오세암이라는 암자가 있다. 그곳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 앞뒤 옆 어디를 봐도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아늑한 곳이다. 하지만 어디를 봐도 봉우리로 시야가 막힌 그곳을 나는 잠깐밖에 좋아하지 못했다. 아늑한 만큼 답답했다. 산을 좋아하고 숲을 좋아하지만 정말 그랬다.

내가 있을 때는 영하 20°면 날이 따뜻하게 풀렸다고 말하게 되는 겨울이었다. 간혹 등산객들이 오가다 들려 몸을 풀고 가지만 대부분 고요하고 적막했다. 적막하지만 자동차 수십대가 시속 300km의 속도로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광풍이 몰아치기도 했다. 그런 곳에 서너 명의 사람들이 암자를 지키며 아웅다웅 살고 있었다.


그곳의 기도 스님은 소임에 맞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한마디의 문장을 말하기 위해 입안에서 몇 번이나 혀를 굴려야 했고, 새어 나오는 소리를 바로잡기 위해 이와 입술에 힘을 주어야 했다.

'이런 분이 기도 소임이라니. 염불을 할 수 있을까?’ 참으로 걱정되었다.

하지만 기도 시간이 되자 나의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어떻게 그리될 수 있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바람처럼 달려가 산허리에 부딪혔다 되돌아오는 것같은 굵고 우렁찬 소리. 스님은 같은 소리를 지겹도록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연습하고 있었다. 하루에 몇시간씩 그것도 매일, 하나의 소리가 걸림없이 풀리면 쉬지 않고 또 다른 소리로 이어갔다.

예불 시간이 되면 스님의 염불은 편안하게 울려 퍼졌다. 리듬이 유연하고 끊김도 없었다.


그런데 말을 할때는 왜 더듬지??


“당신이 지금 어떤 위치에 있든 당신은 최선을 다해 살아왔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훌륭하게 살아낸

것이다. 결과가 어떻든 지금까지 살아 낸 당신은 그 자체로도 훌륭하다.”


어느 날, 종무소의 따뜻한 마룻바닥에 앉아 차담 중 나도 모르게 신세 한탄을 하자 스님이 해준 위로이다.

말을 더듬느라 몇 안 되는 문장을 말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정말 그런가.’


나 자신이 참으로 한심하다고, 이 나이 되도록 겨우 이 자리에 앉아 있다고, 어떻게 살아도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삶이 그대로 멈추어 버린 것 같다고 했었다. 이럴바엔 진짜로 멈춰버리고 싶다고.

그때 그 스님의 말씀에 위안을 느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그 한마디가 가슴에 남아 있다가 한 번씩

떠오르는 건 아마도 늘 그와같은 위로가 필요해서이리라.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어떻게 해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삶 때문에 절망하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바라보고 있는 내가 다 슬프고 아플 지경이다. 그런 내가 누구를 위로하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감히.

슬프기도 하고, 아프기도 한데 그렇다고 크게 괴롭거나 불행한 것은 또 아니다. 아직은.

그런데도 가끔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올 때가 있다. 내가 꼭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이 뭔지 도저히 몰라 놓치고 있는듯한.

뭘까? 그게.


머릿속에 있는, 구르다 고랑에 처박혀 썩어가는 낙엽 같은 말들이 글이 되다 보면 알 수 있을까. 혹 알게되면, 그것이 어쩌면 나에게 완벽한 위안을 주는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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