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히 글을 그리다.
쓰러지고 나면 바로 듣는 한마디의 위로보다 더 필요한 건 아주 작은 틈이 아닐까.
쓰러진 자신의 상황을 혼자서 직시해 볼 수 있는 시간, 바위와 바위 사이의 틈과 같은 시간
남루한 옷을 걸친 남자가 한산한 전철 안으로 절뚝거리며 들어왔다. 목 언저리가 휑한 데다 볼까지 빨개진 것을 보니 어지간히도 추운가 보다. 그도 그럴 것이 낮부터 꽃샘추위가 풀린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바람이 차가운 3월 초, 대부분의 사람은 두툼한 외투와 목도리로 몸을 싸매고 돌아다니는 중이다. 그런데 그 남자는 멀겋게 목을 내놓은 데다 옷마저 얄팍하게 입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 번씩 그 남자의 목 언저리를 훑고 지나간다.
죽전역에서 출발을 대기하는 전동차 안은 한산 했다. 군데군데 빈자리가 눈에 띄는 게 누구도 서서 가야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꽤나 추워 보이던 그 남자도 어디 편한 곳에 앉았겠거니, 잠깐씩 시선을 줬던 사람들도 일제히 편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는 잠시라도 피로를 풀겠다는 듯 눈을 감거나 무심한 표정으로 바닥을 응시한 채 생각에 잠긴 표정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곧바로 손에 쥐었던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그날은 두 달에 한 번 하는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여차하면 약속 시각에 늦을 것 같아 슬쩍 조바심이 나는 중이었다. 도대체 언제 출발하는 건지, 전동차는 사람들이 다 타고도 한참이나 출발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문은 아직 열린 채여서 거침없이 들어오는 3월 찬 바람에 몸이 으스스 떨린다.
약속 시각에 늦는 게 나는 딱 싫은데, 속으로 우물거리며 연신 휴대폰에서 시간과 약속된 장소를 들여다
보았다. ‘음, 여기서 미금역까지 두 정거장, 내려서 카드 찍고 약속 장소까지는 5~10분, 간신히 시간 맞출 수도 있겠다.’ 하며 생각에 빠져있었다,
마침내 문을 닫겠다는 방송이 나오고 전동차가 덜컹거리며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출발과 동시에 무언가 눈앞으로 쑥 들어왔다.
출입구 옆에 앉아 휴대폰에 빠져있던 나는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남루한 옷을 입은 좀 전의 그 남자다.
불그레한 볼과 목도리 하나 없는 휑한 목이 몹시도 추워 보이지만, 주름 하나 없이 탱탱한 얼굴은 아무리
많이 봐도 마흔 살 안짝이다.
그 남자가 코팅된 A4 반절 정도의 종이를 내 무릎 위에 던지듯 올려놓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눈이라도
마주칠세라 급히 옆자리로 이동해 간다. 아마도 저쪽 가장자리에서부터 차례로 돌고 왔을 그 남자의 다리가
절뚝이며 바닥을 지이익 끄는 게 보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가 뭘 하는 건지, 내민 것이 무엇인지 이내 알 것 같아서, 또 거기 적힌 내용이 딱히
궁금하지도 않아 그의 손에서 떨어진 종이를 비어있는 옆자리로 바로 밀어 버렸다.
전철 안에서, 바구니 하나 챙겨들고 음악을 틀거나,
종이쪽지를 던지듯 주고는 수금하듯 구걸하는 모습을 처음 본 것은
십수 년 전 서울에 올라오면서였다.
그 낯선 광경을 보며, 사는 것이 팍팍하지만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고개 돌려 외면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신기해하며 천 원짜리 지폐 한두 장 정도를 그들에게
쥐여줬었다.
너무 조금이어서 미안한 마음과 소중한 남의 물건 보관하듯 손에 잘 쥐고 있던 종이와 함께.
하지만 도시 생활이 오래되면서 어느새 나도, 무시로 맞닥뜨리는 그들의 구걸 행위에 무감각해졌다.
종이를 다 돌린 남자가 어느새 종이를 걷으며 다시 돌아왔다. 말을 할 수 없는 건지, 아니면 부러 말을 안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받든 안 받든 그저 말없이 종이를 건넸다가 말없이 걷어 가던 그 남자가 내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자기가 내밀었던 종이는 옆자리에 팽개쳐지고 대신 휴대폰만 만지작대는 내 손을 잠깐, 아주 잠깐 말없이 쳐다보고는 시선을 돌린다. 그런데 그 눈이 슬픔과 모욕감으로 가득해 보이는 건 나의 착각일까.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나는 내 옆의 종이를 집어 주려 하고, 그 남자는 몸을 구부려 내 옆자리로 밀쳐진 종이를 집으려던 순간 전동차가 심하게 덜컹거렸다. 동시에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은 남자의 몸이 내 앞으로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몹시 당황한 남자는 균형을 잡기 위해 위치를 바꾸며 손을 뻗어 손잡이를 잡으려 버둥거렸다. 하지만 전동차의 움직임에 따라 그 남자의 불편한 다리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서 있던 위치를 바꾸려던 다리가 엇박자로 갈리며 다른 쪽의 제 다리를 걸어버린다. 손잡이를 잡으려던 남자의 손이 허공을 휘젓다가 그대로 저 멀찍이 나가떨어졌다.
‘철퍼덕!’
https://brunch.co.kr/@doramul/6(너무 길어서 1.2로 나눔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