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산업이 반등할 잠재 요소
INTRO
이제는 출판 산업을 향한 모든 시선이 진부하다. 출판사도, ‘벼랑 끝 출판사’라는 위기론도, 그 위기를 타개해 부흥이 올 것이라는 기대도. 모두 새롭지 않다. 마치 대한민국이 휴전국이며 분단국가라는 사실을 오랫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다 보니 어떠한 위기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숟가락 하나 더 얹어본다. 출판계, 사양 산업인가? 내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고점은 지났으나 반등의 가능성은 열려있다. 오늘날엔 책이라는 이유로 외면받지도 환영받지도 않는다. 책이 신성했던 고점을 넘고, 책이라면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진부함의 끝을 지나 도달한 위치다.
잘 하면 잘 되고 못 하면 못 된다. ‘0’의 상태로 돌아온 출판계가 반등할 잠재 요소를 정리해 보려고 한다.
반등 잠재력 ① 물성매력
돌고 돌아 클래식
물성매력. 특정 대상에 경험 가능한 물성을 부여함으로써 손에 잡히는 매력을 지니게 만드는 힘이다. 개념을 소개한 『트렌드 코리아 2025』는 이런 설명을 덧붙인다. ‘만지고 느낄 수 있어야 비로소 존재한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는 비물질 시대지만 우리는 여전히 체감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갈구한다.’
물성매력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물성매력은 손에 잡히지 않아 추상적인 것에 대해 감각 요소를 동원해 체감할 수 있는 속성을 부여함으로써, 인지적·정서적·행동적 경험을 할 수 있게 하는 작업이다. 즉, 물성을 통해 소비자가 알고, 좋아하고, 구매하도록 만드는 일련의 노력을 의미한다.
물성매력이 디지털과 AI로 대표되는 현대사회에서 물리적 실체를 갈망하는 ‘본질로의 회귀’인 만큼, 종이책과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다. 비물질적 콘텐츠에 물성을 부여해 손에 잡히게 만든다는 물성매력의 기본 개념은 종이책의 존재 이유와 다를 바 없다. 구전되던 이야기를 문자로 기록한 게 종이책이지 않은가.
반등 잠재력 ① 물성매력
기분 좋은 경험, 너 내 것 해라
물성매력의 특징은 ‘감각을 통한 체험’이다. 비물질적 콘텐츠를 현실에서 구현함으로써 오감을 활용해 체험하며 실재한다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은 경험을 소장하고 싶어 하는 욕망으로 이어지고, 결국 소비에 도달한다.
찰나의 경험을 오랫동안 소장하고 싶어하는 욕망은 출판계에 희소식이다. 책은 오랜 시간 보관하는 데 두각을 드러낸 매체이기 때문이다. 책은 본래 지식 전승을 위한 수단이었다. 지식을 체계적으로 전달하는 기능에 주력했던 만큼 보존력에 관한 신뢰가 깊다. 즉, 내가 좋아하는 콘텐츠를 ‘책’으로 가지면 오랫동안 소유할 수 있다는 믿음이 기저에 깔려있다. 인류가 수세대에 걸쳐 경험했기에 책이 지식을 널리 전파하고 오래 보존하는 데 용이하다는 인식은 DNA에 각인된 믿음에 가깝다.
책과 물성매력은 분명 연관성이 있다. 이제 책은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물성매력을 보여줘야 한다. 물리적 실체를 갈망하게 회귀한 건 맞으나, 콘텐츠 소비 방식이 과거로 후퇴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감각을 통한 체험’이 담긴 책이 소장 가치를 얻는다. 출판계가 고민해야 할 지점이 여기다. ‘감각’과 그로 인한 ‘체험’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반등 잠재력 ② 서울국제도서전
출판계의 대명절
서울국제도서전은 출판사 팝업스토어를 한데 모은 ‘텍스트 테마파크’다. 출판사, 독서인, 나아가 비독서인까지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이 됐다.
1945년 교육전람회로 시작한 서울국제도서전은 2025년 15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몰리며 5년 연속 역대 방문객 수를 갱신하고 있다. 이는 매년 감소하는 독서 인구에 반하는 기록이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독서 인구는 2023년 48.5%로 10년 전과 비교해 13.9% 감소했다. 줄어드는 독서 인구와 대비돼 늘어나는 방문객 수는 출판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소비자는 평소 책을 읽는지와 상관없이, 흥미를 끄는 콘텐츠라면 책이라 할지라도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서울국제도서전은 운동회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기분 좋은 경쟁의 장을 마련한다. 도서전 기간 모든 참가사는 부스 운영에 매진하며 신박하고 재미있는 기획을 뽐낸다. 상대 부스의 방문객을 ‘빼앗으려’ 하기보다는 자기만의 색깔을 담은 개성을 ‘뽐내려’고 한다. 이는 볼거리를 늘리고 다채롭게 만들어, 도서전이 적절한 경쟁의 장점을 누리도록 한다.
반등 잠재력 ③ 출판계를 젊게 만들 스타의 등장
독서가 젊어졌다. 책이 늙은 매체라는 인식에서 벗어났다. 여기에는 독서친화적 인플루언서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다. 알고리즘에 책의 비중을 늘린 덕에 책이 트렌디한 키워드로서 이야깃거리 중 하나가 됐다.
책을 다룬 콘텐츠는 꾸준히 있었음에도 최근 흐름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독서친화적 ‘인플루언서’ 때문이다. 방점이 앞이 아닌 뒤에 찍혀있다. 콘텐츠 생산, 소비의 핵심 주체로서 무엇이 트렌드인지 규정하는 젠지세대(1995~2010년생)가 책을 논하기 시작했다. 책은 늘 이야깃거리였지만 ‘누가’ 이야기하는지가 달라졌다.
반등 잠재력 ③ 출판계를 젊게 만들 스타의 등장
누가 출판사 재미없대
현대식 북튜버의 주춧돌은 ‘민음사TV’다. 민음사TV가 사랑받는 이유는 명료하다. 재미가 있다. 유쾌하고 다정한 언어를 쓰는 이들이 모여 만드는 시너지가 영상 밖으로 뿜어져 나온다. 민음사TV는 책을 중심 소재로 ‘재미있는’ 콘텐츠를 제작하는데 성공하며 북 콘텐츠의 진입장벽을 낮췄다.
오늘날 북 콘텐츠에서 태풍의 눈을 담당하는 건 출판사 ‘무제’의 사장이 된 박정민 배우다. 배우로서 활발히 활동하던 박정민이 출판사 대표가 됐다. ‘배우’와 ‘출판’의 믹스매치는 흥미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출판계를 힙하게 만든다.
박정민 배우는 매력적인 콘텐츠로 인기를 얻어 팬층을 확보한 이들과는 시작이 다르다. 채널의 호스트가 자신의 유명세를 출판계로 끌고 왔다. 태풍이 해수를 순환시키듯 그의 행보가 출판계를 뒤집어 놓는다.
반등 잠재력 ③ 출판계를 젊게 만들 스타의 등장
미국물 먹고 날아오른 #BookTok, 한국 입성
미국 #BookTok(#북톡)의 매력을 한국인 입맛에 맞게 살려 인지도를 올린 유튜버 ‘쩜’도 있다. 북톡은 독자들이 좋아하는 책과 작가를 공유하고 평가하는 Tiktok(틱톡) 게시물이다. 쩜은 미국에서 유행한 북톡을 성공적으로 로컬라이징해 한국에 들여왔다.
젠지 세대 사이 북 콘텐츠의 흥행은 미국이 한국보다 빨랐다. 2020년 미국 틱톡 유저들 사이에서 북톡이 뜨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에서 모순이 역주행했듯 2021년 미국에선 매들린 밀러(Madeline Miller)의 『아킬레우스의 노래(The Song Of Achilles)』가 재조명됐다.
미국 내 북톡의 성공 요인은 북톡커들이 10대라는 점이다. 책을 읽고 난 후 눈물을 보이며 자신의 소감을 숨김없이 표현하거나, 흥분해 책을 집어던지는 등의 솔직한 영상을 보고 작품에 대한 애정이나 감정을 공유한다. 쩜은 북톡의 핵심을 살렸다.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고, 아쉬운 작품에 실망을 표한다. 작품을 보고 난 후의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반등 잠재력 ③ 출판계를 젊게 만들 스타의 등장
리뷰 유튜버 2세대 등장이라...재밌어지겠는데?
기존 리뷰 콘텐츠에서는 ‘독서 특구’가 존재했다. 작품을 리뷰하는 크리에이터들은 영화와 드라마에 한해 쉽게 경계를 넘나들며 영상을 제작했다. 지무비, 고몽, 김시선 등 유튜버들이 영화 리뷰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채널 규모가 커지면서 방송사와 협업해 신작 드라마를 소개한 때부터다. 반면, 북 콘텐츠는 다른 분야로 취급됐다. 모두 이야기를 다루는 콘텐츠지만 책은 독립된 리그에 속해 있었다.
책까지 확대된 건 다음 세대가 출현하면서다. 단순히 작품의 줄거리를 소개하던 1세대 리뷰 유튜버를 지나, 다음 세대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주를 선보였다. 유튜버 ‘찰스엔터’가 드라마, 연애 프로그램을 보며 즉각적인 반응을 담은 ‘리액션 영상’을 만든 게 대표적이다.
유튜버 ‘하말넘많’이 넣은 변주는 ‘인사이트’다. 이를 보여주는 건 주력 콘텐츠인 「강의의 神」과 「리뷰의 神」이다. 칠판을 활용한 강의 콘셉트로 소개할 만한 모든 이야기를 다룬다. 줄거리를 소개하는 데에서 나아가 본인만의 해석을 제시하고 생각할 지점을 짚는다.
하말넘많은 리뷰 콘텐츠의 소재로 책을 포함했다. 「강의의 神」, 「리뷰의 神」은 영화, 드라마, 예능, 그리고 책을 다룬다. 출판계에 끼친 의의는 책을 어떠한 주제나 이야기를 담는 매체 중 하나로 인식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책이 성역에서 내려와 콘텐츠를 담는 그릇 중 하나로 인식되는데 기여했다.
이러한 효과를 창작자가 의도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영화, 드라마, 예능과 같은 무게로 책을 소비해 온 창작자의 기존 태도가 콘텐츠에 반영됐고, 독자들은 은연중에 그 태도를 내면화하는 것이다.
성역에서 내려와 하나의 매체로서
크게 세 가지 반등 요소를 알아보았다. 물성매력, 서울국제도서전, 독서친화적 인플루언서. 반등 요소가 갖추어진 건 축하할 일이다. 하지만, 출판계가 갖추어야 할 기본 태도는 ‘호재를 기다리기보단, 호재를 만들어야 한다’라는 점이다. 여전히 자극성이나 인기 지속성 측면에서 밀릴 여지가 많다.
2024년부터 출판계에 호재가 많았다. 모순 등 역주행 작품 등장,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박정민의 출판사 무제.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건 특정 콘텐츠나 인물이 주목을 받은 것이지, 출판 시장이 부흥기를 맞이한 것은 아니다. 이 호재가 출판 시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건 맞으나, 특정 출판사가 수혜를 받는 양상이 더 돋보인다.
‘텍스트 힙’이라는 새로운 경향성 아래 출판 시장이 떠오르는 산업이 된 것도 아니다. 텍스트 힙은 고리타분한 이미지였던 책을 촌스럽지만은 않은 매체로 승격시켜 다른 매체와 엇비슷한 위치에 설 수 있게 했을 뿐이다. 출판계가 대중의 관심을 받은 이유는 드라마, 영화 등 다른 콘텐츠와 견주어도 흥미를 끄는 특정 기획, 사람, 작품이 있었기 때문이다.
독서 특구 속에 머물며 안정에 도취된다면 끈질기게 따라붙는 ‘위기’ 수식어를 달고 예스러운 이미지로 다시 전락할 것이다. 책도 영화, 드라마, 예능과 나란히 서서 하나의 채널로서 경쟁해야 한다. 케데헌, 폭싹 속았수다, 모순, let’s go를 외쳐보자.
│참고문헌
김난도, 전미영, 최지혜, 권정윤, 한다예 저 외 5명. 트렌드 코리아 2025. 미래의창. 2024.
김민수. 15만명 '대박 흥행' 서울국제도서전 홀로서기 성공한 이유. 노컷뉴스. 2024.07.03.
김민주. Z세대가 선택한 책, 베스트셀러 된다...'북톡' 열풍. 매거진한경. 2025.02.20.
통계청. 독서인구. 지표누리 e-나라지표 홈페이지. 검색일자: 2025.08.31.
한성학. 미국 출판계에서 주목하고 있는 북톡(BookTok)의 영향력. 출판N. 202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