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디아인의 관점에서
폭력이 고차원적일수록 평화도 복잡해진다.
'진격의 거인'을 파라디 섬 속 에르디아인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도달해야 할 평화의 개념이 확장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소극적 평화가 전부라 믿었던 이들이 구조적 폭력을 마주하며, 적극적 평화에 이르기 위한 방법을 새롭게 고민하게 되는 여정이다.
갈퉁의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필요한 이론적 배경을 간략히 짚고자 한다.
노르웨이의 사회학자인 갈퉁(Johan Galtung, 1930-2024)은 전쟁의 예방과 억제를 중요시하는 경향을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로 규정하며, 인류의 이상인 평화를 실제적으로 고양하는 데 중점을 둔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의 개념을 주창했다.
갈퉁은 전쟁은 없앤다는 제한된 시각의 소극적 평화로는 인류에 진정한 평화를 제공할 수 없다는 비판을 바탕으로, 전쟁은 물론이고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까지 제거하여 인류 사회의 공영을 보장하는 적극적인 노력이 추진될 때 진정한 평화가 달성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즉, 소극적 평화는 전쟁, 폭력 등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이 없는 상태를 뜻하며, 적극적 평화는 소극적 평화에 더해 빈곤, 불평등, 차별과 같이 구조적·문화적 폭력까지 없어진 상황을 의미한다.
평화의 차원이 확장되다
파라디 섬의 에르디아인들은 오랫동안 눈에 보이는 것과 싸워왔다. 이들의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는 '거인'이었다. 거인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물리적인 방식으로 제거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조사병단은 거인의 목뒤를 베는 방식으로 위협을 제거하며 소극적 평화를 최종 목표로 삼았다.
만약 에르디아인들이 알고 있던 세계가 전부였다면, 이 목표는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은 벽 바깥으로 나가 구조적 폭력을 마주한다. 벽 밖에는 거인뿐만 아니라 국가가 있었고, 그 안에는 혐오, 차별 따위의 더 큰 차원의 폭력이 기다리고 있었다. 에르디아인은 자신들이 믿던 전부가 세계 정치에 편입된 일부였음을 깨닫는다.
이제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과 싸워야 했다. 혐오에 기반한 오묘한 눈빛, 인종의 차이로 우열을 가르는 사상, 신분에 따라 차별하는 사회 구조. 구조적 폭력은 '거인'과 달랐다. 눈에 보이지 않았고, 어디를 공격해야 제거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사회가 휘두르는 폭력을 정당하다고 내면화한 모든 사람이 적이었으나, 동시에 별반 다르지 않은 평범한 이웃이기도 했다. 어디에 칼날을 들이밀어야 할지, 무엇을 피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벽 너머에는 바다가 있고, 바다 너머에는 자유가 있다고. 그렇게 믿어왔어.
근데 아니었어. 바다 너머에 있는 건 적이다.
그럼 저 너머에 있는 적들을 전부 죽여버리면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방법을 모르겠다면, 보고 배운 대로
방법을 모르겠다면, 지금까지 해 온 대로 하는 수밖에. 에렌 예거는 물리적 폭력을 제거한 방식으로 적극적 평화에 도달하고자 했다. 이러한 선택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축적해온 경험 속에서 도출된 필연적인 결론이었다.
에렌은 거인에게 물리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소극적 평화를 성취해왔다. '폭력에는 그에 상응하는 폭력으로 맞선다'라는 것이 그가 경험으로 쌓아온 유일한 데이터이다. 에렌은 구조적 폭력도, 이를 비폭력적으로 해체한 경험도, 성공 사례도 갖고 있지 않았다.
에렌은 자신의 평화가 깨졌던 순간부터 재연하기 시작했다. 벽 바깥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벽 안의 세계를 파괴했던 라이너처럼, 에렌 역시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다른 세계를 파괴했다. 방법을 모르겠다면, 지금까지 해 온 대로 하는 수밖에. 에렌 예거는 물리적 폭력을 제거한 방식으로 적극적 평화에 도달하고자 했다. 이러한 선택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축적해온 경험 속에서 도출된 필연적인 결론이었다.
에렌은 거인에게 물리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소극적 평화를 성취해왔다. '폭력에는 그에 상응하는 폭력으로 맞선다'라는 것이 그가 경험으로 쌓아온 유일한 데이터이다. 에렌은 구조적 폭력도, 이를 비폭력적으로 해체한 경험도, 성공 사례도 갖고 있지 않았다.
에렌은 자신의 평화가 깨졌던 순간부터 재연하기 시작했다. 벽 바깥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벽 안의 세계를 파괴했던 라이너처럼, 에렌 역시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다른 세계를 파괴했다.
- 어째서지 라이너? 어머니는 왜 그날 거인에게 잡아먹힌 걸까?
- 우리가 그날 벽을 파괴했으니까.
- 왜 벽을 파괴했지? (…) 너의 임무는?
- 시조를 탈환해서 세계를 구하는 거다.
- 그래.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지.
(…)
- 에렌, 어떻게… 뭐 하러 여기 온 거야
- 너와 똑같아. 모르겠어? 너와 똑같다고. 어쩔 수 없는 그거 말이야.
땅울림은 그 연장선이다. 에렌은 압도적인 물리력을 통해 전 세계 인구를 말살함으로써, 구조 자체를 붕괴시키려 했다. 소극적 평화를 이루는 데 사용했던 방법론을 적극적 평화의 차원에까지 확장해 적용한 것이다. '에렌의 방법이 옳았는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는 없었는가'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에렌은 더 나은 선택지로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바보가 힘을 갖게 된 거야. 그래서 이런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거고.
'진격의 거인'에서 인류는 거인의 힘으로 세계 인구의 80%가 사라진 이후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폭력의 차원이 확장되었다면, 평화에 이르는 방식 역시 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우린 싸워야 해. 더는 싸우지 않기 위해서. 또다시 안녕과는 거리가 먼 날들을 보내게 된다 해도.
p.s. 갈라진 세상에서 '세상을 지킨다'는 공익인가, 사익인가
세계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분리되어 있다. 한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다른 세계를 파괴해야 하는 일이 적지 않게 일어난다.
그렇다면, 갈라진 세계에서 우리가 말하는 '세상을 지킨다'는 말은 공익인가, 사익인가. 그 '세상'은 과연 누구의 세상을 의미하는가. '세상을 지킨다'는 대의는, 다른 누군가의 세상을 위협하거나 파괴하는 명분이 되기 쉽다. 누군가를 공격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공익은, 대의를 명분으로 한 사익이다.
│참고문헌
박휘락, 「평화연구의 현실성 강화: 적극적 평화와 소극적 평화의 수렴을 중심으로」, 의정논총 제5권, 2010, 334-3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