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백 스물 한 번째 주제
하루만 네 기억의 틈 어디에선가
머무를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좋겠다.
우리가 다투고 눈물로 지새우던 밤이라던지
늦은 밤 슬리퍼를 신고
편의점 아이스크림 하나로도
새벽 내 별을 헤아릴 수 있던 순간이라던지
그런 아프고 따스했던 순간보다
사실은 그저
네가 눈을 뜨고 잠들던 그런 하루를
내가 바라볼 수 있었다면.
언제 잡아도 적당히 따뜻했던 손과
네 품이 이렇게도
매일 그리울 줄 알았다면,
나는 그저 네 하루 안에 살 걸 그랬다.
-Ram
1.
기차 안에서 지나가는 풍경들을 보며 예전 일들을 떠올려보았다.
평소에는 떠올리지 않는 순간들을,
떠올리면 감상에 젖을까봐 굳이 생각하지 않았던 순간들을.
결론은 아름다웠다.
그 모든 것들이 다 아름다웠다.
그 때의 대화도, 미소도, 분위기도, 모습도.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지금 내가 숨쉬고 있는 시간들도 전부 아름다운 과거를 만드는 순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
생각의 뿌리들 대부분은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다.
어떤 경험을 어떤 식으로 했냐에 따라 가치관에 영향을 미치고,
그 안에서 생각이 움튼다.
3.
몇 년에 걸쳐 과거의 장소를 간 적이 있다.
처음엔 낯선 장소였다가, 두 번째엔 가기 싫어진 장소였다가, 세 번째엔 아련한 장소였다가,
네 번째엔 익숙한 나만의 장소가 되고야 만다.
그렇게 하나, 하나,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4.
100% 완전한 확신은 없을 것이다.
그 순간 완벽한 확신은 있을지 몰라도.
5.
그런 사람이 있다.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하여도
날 이해해줄 것 같은 사람.
하고 싶은 말이 한보따리라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그냥 생각나는 대로, 주절주절 이야기해도 되는 사람.
내 생각을 마음껏 내뱉어도,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들어주는 사람.
과거에 내게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였고, 지금도 내겐 여전히 그런 사람이다.
6.
욕심에, 과거로 만들기 싫은 순간들이 있다.
많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완벽한 순간들이라 계속 내 곁에 도망가지 못하게 붙잡아두고 싶은 그런 순간들.
이를 테면 바람이 솔솔 불어 머릿결이 흩날려 조금은 흐트러져도 따뜻한 햇살에 기분 좋은 순간이라던지,
맛있는 커피를 마시는데 좋아하는 음악이 우연찮게 흘러나와 집중하는 순간이라던지,
소중한 사람과 함께 달콤한 대화를 나누는 순간이라던지,
길을 걷다가 라일락의 꽃내음이 내 코를 간지럽혀 행복한 순간이라던지,
생각지도 못하게 반가운 메일을 받고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내용을 확인하려는 순간이라던지.
-Hee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야만 누군가를 편견없이 바라볼 수 있다고 믿었었다.
사람은 언제나 변할 수 있고,
그러한 가능성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과거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과거에게 발목 잡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누군가에게 존재하는 나는 과거의 나로 남아있다.
-Cheol
헤어지고도 친구처럼 잘 만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때는 나도 어쩌면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헤어지고도 다시 만나기를 몇번이고 반복하는 사람들처럼 다시 또 만날거라고. 하지만 첫사랑은 그냥 허탈하게 끝나버렸다. 뭐가 그렇게 못마땅했던지 내가 다 망쳐버렸다. 좋아하지 않는데 좋아하는 척을 하는 건 넌더리가 났고 나를 많이 좋아해주는 사람을 잃는 건 겁이 나서 절절매다가 다 엉망진창으로 만든 것이다. 이제는 얼만큼 사귀었던지 함께 뭘 했던지 생각이 잘 나지 않을 만큼 시간이 지났지만 며칠 전에는 나도 어쩔 도리 없이 그 사람을 다시 떠올렸다. 무던히 잘 지내다가도 가끔씩 떠올리던 그 밉고 고마운 얼굴을 한참만에 다시 생각했다.
‘헤어져.’
‘헤어지고 싶어.’
‘우리 헤어질까.’
‘끝내자.’
너를 좋아하는지 좋아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쪽으로 계속해서 생각이 치닫았다. 너무 외롭게 만들지 말라는 말을 듣고는 생각이 더욱 기울었다. 아무렴, 좋아한다면 사람이 이렇게 졸렬할 수 없지. 나는 너무 싸구려같이 굴었다. 계속해서 연애가 짧게 끝나버리고 스스로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는 진짜로 한 사람을 좋아해 본 적이 없을 뿐이라고, 성격이 맞지 않았을 뿐이라고 가볍게 말했지만 이건 내게는 꽤 심각한 문제였다. 또 이렇게 헤어진다면 정말로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 진단을 내리고는 관계를 억지로 붙잡았다. 그리고 끝내는 놓아버렸다.
“우리 헤어지자.”
입 안을 간질이며 맴돌던 말이 끝내 쏟아졌다. 쏟아냈다. 얼굴을 마주하면 헤어지자는 말을 급하게 내뱉고 당장에 뛰쳐나올 작정이었는데 생각보다 그 말을 하기까지가 오래 걸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얼굴이 이상하게 너무 반가워서, 밤새 고민해 날카롭게 갈아 놓은 마음은 금새 뭉그러져버렸다. 괜히 웃는 너를 따라 나도 모르게 웃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예전처럼 한참을 앉아 울면서 힘겹게 내뱉지 않았다. 헤어지고싶은 이유랍시고 상대를 헐뜯고 매섭게 깎아내리지도 않았다.
헤어짐에 방법 따위는 없겠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나아졌다고 생각했다. 애인과 헤어지고 나서 괜히 지난 애인의 얼굴이 자주 생각난다. 그때도 이렇게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는데. 부끄러운 그때가 미안하고 슬프고 아주 조금 그립다.
-Ho
2016년 5월 1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