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백 스물 네 번째 주제
(1)
당신을 상자에 담던 날,
무엇 하나 내게 성한 것이 없었어
우리가 함께 걸어온 시간들이
마치 당신과 함께 담겨 사라지는 것만 같아
몇 번이고 빈 손을 움켜쥐고 울부 짖었는지
한 뼘 남짓한
작은 공간에서 잠들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넓은 세상에서 숨 쉬게 할 것을
(2)
사람 마음이란게
저마다 크기도 모양도 다른 상자를 갖는 것과 같다.
우리가 나름 잘 맞는 사이라고 생각했을 때
사실은 네가, 혹은 내가 더 많이
우리를 품은 채로 아파했는지도 모른다.
공허함은 완벽하게 채워지지 않은 채로.
(3)
오래된 나의 습관 중에는
상자를 잘 버리지 않는 습관이 있는데,
왠지 모르게 튼튼하고 예쁜 상자를
쌓아두고 모아두게 된다.
그냥 그 안에 담는 게 좋으니까.
무엇이라도 무언가라도 담겼으면 좋겠으니까.
-Ram
1.
케익상자를 들고다니면
기분이 좋다.
곧 상대방을 만나 잔뜩 축하해주고,
함께 함박웃음을 지을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코 앞에 있는 것 같아
설레고 기분이 좋다.
굳이 생일이 아니어도.
좋은 날엔 케익을 자주 떠올리고,
결국 케익을 산다.
요즘엔 친구들과 자주 모이지 못하지만,
종종 케익 하나와 흔한 와인 한 병을 사들고
친구들끼리 모여 잔을 기울이고,
하하호호 웃으며 케익을 먹었다.
아무런 기념일 등이 아닌데도
그 날이 우리에겐 특별한 날이 되었다.
케익상자를 들고 가는 곳은
곧 행복한 기운이 넘치게 된다.
내가 케익을 사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다.
2.
그 사람은 아주 귀엽게 맥북 뒤에
조그마한 상자를 숨겨서 천연덕스럽게 걸어왔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의 폼만 봐도
맥북 뒤에 뭔가 있구나, 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리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보다 엄청나게 귀엽고 순수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3.
상자에 넣어 고이고이 보관할 것과,
상자에 넣어두지 않아도 될 것들과,
상자의 공간만 차지하고 있는 것들을
잘 구분해야 한다.
이 판단은 한 번에 끝나면 안된다.
생각보다 자주 판단하여야 한다.
-Hee
시간이라는 것이,
스쳐지나가는 자리에 그대가 있고
스쳐지나가는 자리에 내가 있고
스쳐지나가는 자리에 우리가 있어
우리가 거쳐가는 그 곳에
상자하나를 놓아둘 수 있다면
나의 마음을 담아 두어
혹여나 지나칠 뒷날의 당신에게
선물하고 싶습니다.
-Cheol
보증금 묶인 원주 집에는 몇 해 동안 죽어간 벌레 뉘인 상자들이
전공 책이라 쓰인 상자 옆에는 잘 안 입는 옷이라 크게 쓰인 상자가
또 그 위에는 간절기 상자, 겨울 상자가 휴가철 홀로 남은 개처럼 외롭게
‘엄마 나도 코트 사주라.’
‘그래. 주말에 시장에 가자. 뱅뱅 가면 있을 거야.’
‘진짜? 그래도 돼?’
키가 더 자랄 거라며 한참 크게 산 코트에 몸이 맞아지기도 전에
잘 안 입는 옷 상자 속으로 긴 기장이 반에 반으로 접힌 채 외롭게
아픈 추억들이 미용실 앞 전봇대에 목묶인 개처럼 외롭게
‘오늘 저녁은 뭘 드시고 싶어? 두부를 데쳐 먹을까?
‘응. 그런데 엄마 옛날에 나 코트 왜 바로 사준다고 했어?’
‘그냥. 마음 아파서.’
사는 게 생각보다 녹록했다고, 이유없는 사과가 담긴 편지를 읽다가
그냥 떡볶이 코트 생각이 났다.
-Ho
2016년 5월 22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