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백 스물 여섯 번째 주제
아득히 먼 곳에도 네가 없음을 안다.
침묵이 불러온 고요함 속에서
몇 곱절의 시간을 눈물로 지워도
나는 너를 차마 그리지도 못했다.
숨이 막히도록 아찔한 파도가
그대로 나를 덮어도
쇳소리 하나 낼 수 없는 먹먹함이었다.
목놓아 울던 밤도
서슴없이 집어삼키는 고요함은
나를 얼마나 더 애잔하게 만들어야 끝날지.
당신은 모른다.
얄궂은 기억,
사라지지 말아라
내가 사랑했던 모든 순간아
-Ram
1.
지금까지의 나는 감정의 선을 잘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드는 감정이 지나치게 선을 넘어버리면,
넘은 선을 쉽게 잊을 수 없고, 쉽게 그 선을 넘어버릴 수 있기에.
최근에 지금까지 살면서 잘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을 느꼈다.
특히 똑같은 '화'가 나더라도,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실로 다양했다.
동시에 내가 지금껏 '화'라는 감정을 다채롭게 느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대한 '화'를 내지 않으려고 했고,
'화'가 내 자신을 감싸지 않게 노력했었다.
하지만 '화'를 영원히 피할 수는 없었기에.
다양한 '화'들이 나를 지나칠 때마다, 그 '화'를 표출하지 못했다.
그냥 당황스러웠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내 자신에게 당황했다.
어떻게 이야기하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하나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과거에 동일한 감정이 들었을 때가 없었기에,
과거에 행동했던 것들을 참고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당황만 한 채 '화'를 떠나보냈다.
오히려 뒤돌아보면 이렇게 '화'를 떠나보낸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앞으로 내게 지금껏 느끼지 못한 어떤 감정들이 또 다가올까.
그 감정들을 맞닥뜨리며 당황하는 내 자신의 모습을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이런 새로운 감정들을 하나하나 받아들이면서 성숙해지는 걸까.
감정의 선을 잘 유지하고 있는 것이 때론 내게 독으로 다가올 지도 모르겠다.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시발점을 내가 스스로 막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느낀 건,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들이, 어휘들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을 나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유쾌하진 않지만 흥미로운 숙제다.
2.
버스에 올랐고, 자리에 앉았다.
아이폰을 꺼냈고, 잠금화면에서 음악 앱의 정지 버튼을 눌렀다.
혼자 밖에서 있을 때는 무조건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데,
듣기 싫어졌다.
이어폰에서 내가 싫어하는 노래가 나와서도 아니며,
장시간 이어폰을 낀 내 귀가 아파서도 아니였다.
이것은 그냥 권태였다.
당연한 것에 대한 권태.
그렇게 나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이어폰을 끼고,
시선의 초점을 흐렸다.
3.
'영원한 상냥함과 다정함의 태도'라니.
엄청난 문장이다.
이 작가는 어떤 사람이길래 이런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너무나도 이상적이며, 환상적인 표현이다.
-Hee
- 밤
거제도의 한쪽 귀퉁이
달빛이 비추어지는 바다와
은은한 조명들이 아른거리는 부두를 본다.
아늑하고 고요한 부두에서의 하룻밤은
나의 기다란 손가락 언저리를 잡은 채,
상글상글한 향기들로 나를 감싸안은 채,
나의 자유와 젊음의 끝자락을 이끌어 간다.
한 때, 고요함이 조용함이 두렵고 무서웠다.
모든 것이 어두운 밤
모든 것이 적막에 휩싸인 밤
그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의 깊이
벼랑끝과도 같은 그 곳으로부터 나는 도망쳐 나왔었다.
그리고 이 곳에 와있다
그 때의 어둠을 빗겨내고
새로운 지평과 도전위에 서있다.
결국 그 고요함도 조용함도 깊은 어둠도
구태여 맞설 필요는 없었다.
좌절하고 자책할 필요는 없었다.
그 어둠은 그저 그 곳에 있었던 것일 뿐
그리고 그저 나의 앞에 나타났었던 것일 뿐
그저 침착히 돌아가면 되는 것일 뿐
나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언제나 나의 시선에서 너를 놓치지 않는 것.
그렇게 너에게 다가가는 것.
이 곳에 온것처럼,
그렇게 너에게도 언젠가 도달하리라.
그 곳에서 우리가 조우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이 여정을 소중히 여기리라.
그렇게 이 고요함 속에 안겨 잠든다.
언젠가 마주칠 당신의 고요함에게도 안녕을 건낸다
-Cheol
1. 잘 쓰던 이어폰을 도둑맞은 뒤로는 도통 음악을 듣지 않게 됐다. 무리해서 산 스피커는 종일 전원코드가 뽑힌 채 있고 덕분에 엄마의 잔소리는 조금 줄어들 것 같다. 의외로 지하철 덜커덩 소리도 애기들 칭얼거리는 소리도 괜찮았다. 여태 음악을 너무 과하게 들어서 역효과가 나기라도 한 걸까. 길을 걸으며 들리는 소리들이 너무 평화로워서 자꾸만 그냥 걷고싶다. 마음이 아플 때면 가사가 마음에 꼭 맞게 들어차는 음악들을 찾게 되지만 그저 지쳐있을 때는, 생각만으로도 머리 지끈거리는 일들 앞에서는 하릴없이 누워 희미한 숨소리에 집중하거나 멍하니 걷는게 더 좋겠다.
2. 지하철에서 내린 뒤 사람들이 빠져나간 한적한 대합실의 소리가 좋다. 사람이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 목욕탕의 적막함같은, 긴 연휴가 시작되고 텅 비어버린 건물의 적적함같은 순간들이 요즘은 너무 좋아서 담배를 피우듯 차분함을 찾아든다. 비오는 날 먼지냄새같이 따뜻하고 여행이 끝난 뒤 텅 빈 집에 들어설 때처럼 고요한 순간에 드디어 나는 아무런 고민도 없이 아무렇게나 게을러질 수 있다.
-Ho
2016년 6월 5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