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도란도란 프로젝트 - 열두 번째 주제

by 도란도란프로젝트

사각사각 첫번째.


연필은 생각보다 꽤 클래식한 소재라고 생각한다
나는 칼로 서걱서걱 깎아내는 연필부터 시작하여
손잡이를 돌리는 재미가 있던 은색 연필깎이를 지나
플리스틱 대롱 안에 연필심만 여럿 들어있는 마술연필,
그리고 딸깍딸깍 고상함과 어른스러움의 상징이었던
샤프까지 고루고루 겪어보았다고 자신한다.


샤프는 그 영어 이름과 알맞게 까다로웠다.
힘조절이 쉽지 않아 얇디 얇은 심을 뚜꺽! 하고
끊어먹을 때가 수십번…


하지만 어느새 적응하고 보니
날렵하고 말그대로 샤프한 샤프를
손가락 이리저리 돌려가며 사용하면서도
가끔 지우개 뒷부분이 닳아질까 아껴가며,
몽땅 연필 뒷부분에 다 쓴 볼펜 껍데기를 꽂아
길이를 늘려가며 썼던


그런 불편함이 그립기도하다.



사각사각 두번째.


사실 하고 싶은 말은 지금부터.
나는 실로 연필의 생애를 처음부터 겪었다고
말하였으니, 이 녀석에 대해 열심히 열정적으로
사용했던 때가 있노라 말하고 싶다.


우리 집에선 늘 연필통(꽂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컸다.)에
부지런히 깎여있는 연필이 삐쭉빼쭉 꼽혀있었다
아마 한 2~30자루씩??
일주일에 한 번은 엄마가 이 연필을 모두 늘어놓고
칼로 사각사각 깎아냈다.
물론 칼 사용이 더딘 우리 남매에겐 최대 구경거리.


하지만 연필이 예쁘진않았다.하하
투박한 엄마의 손을 따라 베어지는 나뭇결도
숭덩숭덩 옷을 벗듯 자연스레 날씬해졌다.
엄마는 최대한 나무부분도 연필심 부분도
길고 얇게 깎아주셨다.


매일 곁에서 깎아주지 못하니 길게 길게 심을 남겨주신걸까
아직은 열심히 자라날 우리의 조막만한 손을 위해서였을까


이후, 샤프를 쓰기 시작하면서 부터 엄마의 연필통도 슬슬
채워지지 않았고 자연스레 엄마의 연필깎는 신기술을
보는 일도 뜸해져갔다.
연필깎이를 집에 사두지 않고 늘 직접 깎아주던
엄마는 일부러 늘 20개 30개나 되는 연필을 오래오래 깎으며
우리의 조막만한 손바닥과 칭얼대는 눈을 어여삐 여기셨겠지


내 손이 이토록 크게 성장할 동안
볼펜과 샤프를 잡아 돌릴동안
엄마도 연필을 잊고 사셨겠지


연필은 너무 클래식한 소재다.


-Ram


1.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거실에서 숙제를 하려고 연필을 깎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에서 물을 마셨다. 그리고 더워서 거실을 지나 베란다에 가서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거실로 돌아와 앉아서 숙제를 하려는 찰나! !!!!!!!!!!!!!!!!!!!!!!!!!!!!!!!!!!!!!!!!!!!!!!!!!!!!!!!!!!!!!!!!!!!!!!!!!!!!!!!!!!!!!!!!!!!!!!!!!!!!!!!! 왼쪽 엄지발가락에 굉장한 통증을 느꼈다. 발가락을 쳐다보니 아까 정말 뾰족하게 깎아놓은 연필이 내 왼쪽 엄지발가락 아래쪽에 박힌 게 아닌가………………………. 호러다 호러. 어떻게 이럴수 있지……. 일단 연필심이 안에서 부러지면 더 큰일나겠다는 생각에, 아픈 것을 참고 연필을 조심스럽게 내 발가락에서 뽑았다… 킁. 벌써 그게 13년 전 일이다. 지금도 내 왼쪽 엄지발가락 아래엔 박힌 자국이 있다. 점처럼, 연필심이 들어간 것 처럼, 그런 자국이 있다.


2. 연필로 작업하는 것을 좋아한다. 페이퍼에 와이어프레임을 그릴때, 나는 12cm자와 연필, 그리고 연필깎기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일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필통에 뾰족하게 깎은 연필을 들고다니다보니, 필통을 열어보면 연필심이 부러져 있는것이 아닌가….. 끙.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나는 샤프를 선택했다. 내 필통에 연필과 연필깎기를 추방시키고 샤프와 샤프심을 넣었다. 그리고 어느날 필통을 열자, 이게 웬일………. 샤프심통을 제대로 안닫아서 샤프심이 다 새어나와 필통 안에서 샤프심들이 자잘자잘 부서져 있는 것이 아닌가…… !!!!!!!!!!!!!!!!!!!!!!!!!!!!!!!!!!!!!! 젠장.너무한 아이들.


3. 아주 가끔, 시간도 연필처럼 다시 지우고, 바꿀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그 이진욱과 조윤희가 완전 잘 어울리게 나오는 드라마 나인처럼 말이다. 내가 그때 다르게 행동했으면 어땠을까, 그럼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그땐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을까? 등 의 생각들. 하지만 다시 생각을 바꿨다. 아무도 예측할 수도 없고, 번복할 수도 없는 그런 지금의 인생이 더 재미있다. 더 흥미진진하고 더 스릴있다. 친구 Y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일은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 설레임에 얼른 잠을 자고 싶다고. 더 신나는 내일이 궁금하다고. 그 말을 한 번이 아니라, 정말 항상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긍정적인 마음이 내게도 굉장히 좋은 영향을 주었다. 오늘 힘들었어도, 내일은 어떤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새로운 시간들을 기대하게 했다. 좋은 마음가짐인 것 같다. 하긴, 이런 생각은 고등학교1학년 2학기때도 했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내일의 해는 뜬다'고.


-Hee


한여름의 젊은 날.
어느 작은 화실에 한 남자아이가 앉아있다.
연필 냄새와 물감냄새가 좁은 화실의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다.
조금은 전날의 소나기로 눅눅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 화실에는,
여선생의 거대한 캔버스와 남자아이의 작은 캔버스가 놓여있다.
가슴골이 살짝 보일 정도로 풀어진 단추,
군데군데 물감으로 얼룩진 흰색 셔츠,
머리를 질끈 뒤로 묶은 서른 즈음의 여선생은 허벅지를 드러내고,
인상적인 작품의 거대한 캔버스를 어루만지고 있다.
그 경이로운 모습을 바라보던 남자아이의 마음에는,
이내 이상한 기분이 밀려오고,
어떤 기분인건지 아직은 잘 모르는 열다섯의 남자아이는
이내 자신의 캔버스에 집중한다.


한참을 그림을 그리다 졸음에 빠져버린 남자아이에게,
갑자기 여선생의 땀냄새가 진동한다.


“딱!”
“요놈 요놈 또 졸지! 여기 선이 어긋난 이런 부분은 이렇게..”


여선생의 목줄기에 맺힌 땀방울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이상한 기분이다’
그렇게 생각해 버리고는 이내 갈색 4B 연필과 노란색 때묻은 커터칼을 쥐어든다.


사각.. 사각..
연필끝을 깍아 내는 기분이 좋다. 별일 아니지만 나무를 깍아내는 기쁨과 호사를 누려본다.
짧지만, 가장 즐거운 시간. 괜스레 깍아볼만한 연필이 없나 엄한 연필통을 뒤적거려본다.
연필을 깍아내는 시간은 차분해진다.


모든 것이 풍만했던 순간의 기억. 연필.


-Cheol


펜보다는 연필을 자주 사용한다. 펜은 익숙하지 않달까, 잉크는 기본적으로 액체라는 생각이 들어 내 마음대로 움직이기가 어렵단 생각이 든다. 연필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기도 하고 다양한 매력이 있어 아끼는 편이다. 사각사각 또는 슥슥. 직접 연필을 다듬는 작업을 좋아한다. 그 작업은 기본적으로 나무를 깎는다기 보다, 헌 옷을 벗겨낸다는 기분이 든다


돌이켜보면 그 이전의 나는 연필을 잘 깎는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릴 때는 직접 칼을 잡은 기억이 없고, 그 이후에는 샤프를 썼다. 미술학원에서 처음으로 연필을 깎았던 것 같다. 굵고 진한 4B연필. 입시미술 공부를 할 때엔 연필의 모양따위엔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얼른 깎아서 그림그리기에 바빴으니 연필은 길고 투박하게 깎였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타고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입시미술에 지친 나는 건축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더이상 미대를 목표로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계속 미술학원을 다녔다. 실기를 앞두고 하루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입시반 친구들과는 달리 취미반인 나는 평화로운 생활을 보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지 2년. 연필도 제대로 못깎나며 구박을 하던 선생님이 해주신 이야기가 나를 바꿨다. 신입을 위한 목수들만의 테스트 방법이 있는데, 연필 깎는 것으로 그 사람의 능력을 판단한다고.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 나는 칼로 연필을 깎는 것에 집착하게 되었다.



연필.

그들은 내가 힘을 주면 진해지고, 끝을 세우면 종이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뭉툭해진 끝은 매끄럽게 미끄러지며 부드러움을 느끼게 해 준다. 연필들은 저마다 특유의 향들을 가지고 있는데, 막 다듬은 연필을 사용할 때에는 나무향이 은은하고 쓰면 쓸 수록 흑연향이 짙게 퍼진다. 거기에 연필 자체의 울림이 더해지면 내가 무언가를 쓰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연필이 남긴 흔적들도 매력이 있다. 종이에 따라 색과 질감이 변하기도 하고, 시간의 변화에 순응하는 편이다. 오래 전에 썼던 글이나 일기를 찾아보면 깨끗하게 쓰여졌을 이야기들이 번지고 흐려진 것을 볼 수있다. 나는 연필이 가지는, 우리의 기억과 비슷한 희미한 번짐을 특히 좋아한다. 그래서 가볍게 적었던 글들을 일부러 손으로 문질문질 비벼 볼 때도 있다. 시간이 갈 수록 흐릿해지는 우리의 기억들 처럼 종이 위의 이야기들도 희미해진다.


이동이 많은 날은 샤프로 만족하지만 집 안에서는 연필을 고집한다. 연필을 깎아내고 이런 저런이야기를 끄적이고 다시 옛 기록들을 들춰보는 과정은 일련의 놀이와 같다. 다듬어진 연필들로 가득 찬 연필통을 보며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그려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Min


2014년 3월 30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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