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백 스물 일곱 번째 주제
1.
눈을 뜨면
햇빛 사이로 나뭇잎이 흔들리는
그림자가 보여.
늦은 오후 즈음
여전히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고
네가 주는 온기가 얼마나 따스한지
그대로 녹아버릴지도 몰라.
발끝까지 황홀해지는
기분 좋은 향기, 따스함, 부드러움
그런 것들.
그런 순간.
2.
그때 우리가 다른 길을 걸었더라면,
내가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토록 희미한 감정들을
우리는 언제즈음
다시 물들일 수 있을까.
3.
너는 알까
퍽 예뻤던 우리의 순간들은
그저 추억하기에 나쁘지 않은
그런 순간으로만 기억되고 있다는 것을
네가 아니면 안될 것만 같았던
그 시간들을 지나 나는 혼자서도 잘 해낸다는 것을
누군가 물어오는 네 안부를
조금은 망설이며 대답해야 하는 마음을
그런 것들을 너는 알까
이런 질문조차 쉽게 하질 못하는
그런 마음을 너는 알까
-Ram
1.
2주 전부터 목이 갑갑하더니, 의사가 편도염이라고 했다.
목 안이 다 헐고, 목 안에 백태까지 생겼다고 한다.
몸에서 열도 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3일을 꼬박 집에서 쉬었다.
아, 그리고 의사가 커피도, 술도 모두 마시면 안된다고 했다.
그 두 가지의 금기사항이 나를 생각보다 답답하게 만들었다.
왜 나는 꼭 여름이 되면 아플까. 겨울에는 감기 한 번 안걸리고 멀쩡하더니.
예전에도 여름에 몸살이 제대로 나서 일주일동안 방 안에서만 골골대며,
겨우 아빠가 지어온 정체불명의 센 약을 먹고 나은 적이 있다.
여름을 좋아하는데, 이렇게 여름만 되면 아파서야 되겠나.
내년 여름에는 아프지 않길 다짐해본다.
몸에 컨디션이 급속도로 나빠져서 몸이 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제일 싫다.
몸이 아프면 무기력이 찾아온다. 제발 아프지 말자.
2.
어느 해의 일기장에는 '정신차리자' 따위의 글들을 잔뜩 늘어져있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아무리 정신을 차려봤자 제자리걸음, 또 제자리걸음.
그저 내가 그 시기를 인지하고, 또 인지하리라, 라는 생각으로 적어놓았던 것 같다.
이런 시기도 꿋꿋하게 기억하고, 또는 아무 생각없이 흘려보내지도 않고,
시간이 빨리가라, 라는 등의 말도 안되는 주문으로 하루하루를 덧없게 보내지도 않고,
그냥 말 그대로 그 시기를 받아들였다.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시기에 저항할 수 있는 건
내 서재 속에 꼭꼭 숨겨져 있는 내 일기장을 밤마다 꺼내어 '정신차리자', '정신차리자', 또 '정신차리자'라고 적어놓는 수 밖에.
어느 하루는 답답함이 극에 달했던지, 아니면 분노가 차올랐던지, 마지막 '자'의 글씨를 엄청나게 휘갈겨 써놓았다.
그렇게 내 손에서 해결하지 못할 답답한 시기들이 내 곁을 지나갔다.
다행히 나는 내 일기장의 꽤 많은 면들을 그 시기에 바쳤을 뿐, 어느 다른 것들을 더 희생하진 않았다.
그러기 싫었다.
3.
나를 툭툭 치고 가는 텍스트들에 대해 심장이 약한건지, 마음이 생각보다 약한건지,
머리가 쭈뼛쭈뼛하며,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순간이 있다.
그럴땐 행동이 느려지고, 생각하기를 멈추며, 몸에 힘이 빠지며, 공포심에 휩싸인다.
내가 더 대범해지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루종일 마음이 불편하고, 아무리 나만의 강경책을 펼쳐도,
그 기분을, 그 마음을, 그 순간을 이겨내기가 어렵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때마다 내 옆에는 같이 웃을 수 있는 친구가 있었다.
-Hee
습기가 가득한 6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
눅눅한 서울 시내를 바라본다.
나의 마음은 다 어디로 흩어진것일까
한 점으로 모여 선명하였던 나의 모습은 초점을 잃고는 흐려졌다.
신경쓰고 마음쓰는 일이 많아지고는 몸과 행동은 점점 무겁고 더디어진다.
어찌보면 단돈 10만원으로 새로운 6개월을 만들어가던 나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였다.
발장구를치며 나아가지않고는 금새 물속에 잠겨버리듯이,
더뎌진 나의 사랑이 수면아래로 잠겨들어가기 시작한다.
'침몰'이라는 표현이 적당할까?
이러한 나의 근황에 함께 글을 쓰는 친구도 일침을 놓아준다.
"Cheol씨의 삶에 글 쓸 여유가 없으면 나에게 말해줘도 되요"
글을 쓰지 않는 나는 어떠할까?
생각만해도 소름끼친다.
글을 쓰는 시간이야말로 자신을 돌아보는 유일한 시간이다.
너를 마음으로부터 사랑하는 진실된 시간이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떠내려가듯 살아가는 삶이 소름끼친다.
본질을 모르고 되는대로 사랑하는 것이 소름끼친다.
누구보다 선명하게 산다는 것.
그것이 어째서 이리도 어려운 것일까.
쉼 없이 발장구치며 사는 삶. 요령것 발장구치는 삶.
아직도 익숙치 않은 나인가보다.
두고갈 것은 내려두고 가져갈 것을 짊어지는
결단의 순간이 필요하다.
-Cheol
매일의 태도와 선택, 평범함의 특별함, 일상성의 위대함. 썩 좋지 않은 모든 것들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무사하려면 순간순간의 마음과 마음을 끌어낼 태도가 중요했다. 지난 밤에는 거절할 수도 있었던 술자리를 당연하다는 듯 함께했고 늦은 새벽에 집에 들어와 3시간 뒤 타야 할 기차를 놓치지는 않을까 걱정하다 잠들었다. 출발 20분 전에 겨우 일어나 모자를 푹 눌러쓰고 세상 편한 옷차림으로 기차에 앉아 졸았고 부산에 도착해서도 저녁까지 내리 잠을 자버렸다. 부산까지 와서 잠을 자야했던 이유는 뭘까, 생각하다가 어느새 새벽이다. 이 시간에 서면은 난장판이다. 술취해 아무렇게나 말하며 걷는 사람들과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밤늦게 길을 걷는 나는 너무나 비슷하고. 매일의 태도와 순간의 선택, 좀 잘 살아보자고 계속 되뇌도 나는 자주 우스운 사람이 되어버린다.
-Ho
2016년 6월 12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