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것들"

도란도란 프로젝트 - 백 마흔 세 번째 주제

by 도란도란프로젝트

어느날 꿈을 꾸는데 네가 나왔다.


살얼음보다 더 쓰라린 눈빛으로 나를 보는

그 시선이 너무 따가와서

꿈인줄도 몰랐다.


네가 흙빛으로 사라지는 그 꿈을

다 꾸고 나서야 꿈인 줄 알았다.


네가 떠나던 날,

너는 가고

내게 남겨진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형체를 가진 물건들은 버려졌고 태워졌는데도

기억이라던가 시간이라던가

그런 것들이 어렴풋이 남았다.


네가 남기고 떠난 날카로운 말들이

밤마다 목을 조여오는 것만 같았고,

떠나도 떠나지 못한 것들이

심장을 콕콕 찍어대는 것만 같았다.


네게 남은 것은 어떠한지, 난 모른다.


그저 내게 남겨진 것들이 낮이며 밤이며

찾아들며 내 행복을 찢어도,

너는 내게 남겨진 추억, 그 언저리에 있을 뿐이었다.



-Ram


1. 우스운 행로

아이폰으로 지도를 켰다. 목적지를 설정하고, 현재 위치와 아이폰을 사방으로 돌리며 가야 할 방향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몇 걸음 간 후 확인, 서너 군데 가게를 지나서 또 확인. 커브길이 많은데 왼쪽으로 꺾어야 하는지, 오른쪽으로 꺾어야 하는지 정말 여러 번 확인하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우습게도 목적지에 도착하자 괜히 정이 가지 않았다. 사실 굳이 목적지는 그 곳이 아니여도 상관이 없었고, 가장 중요한 건 변덕을 부린 내 마음이였다. 그래서 원래 정이 붙어있는 목적지로 발길을 돌렸다. 몇 십번은 가던 곳인데, 출발지가 항상 출발하던 곳과는 반대방향이였다. 감으로 그 목적지를 향했다. 두 블럭쯤 갔을까.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머릿 속 지도가 뒤엉켰다. 바보. 다시 아이폰을 꺼내들고 목적지를 설정했다. 아이폰을 사방으로 돌리며 방향을 재확인했다. 완벽하게 반대방향이였다. 정말 바보. 아이폰을 나침반삼아 반대방향(사실은 맞는 방향)으로 다시 걸었다. 처음 목적지보다 3배는 걸어야 했다. 지도를 보면서도 이 길이 맞는지 믿기질 않았다. 지도는 1000% 확실한데, 왜 나는 믿지 못하는 것일까. 그냥 아이폰을 보면서 걸어갔다. 계속 걸었다. 그렇게 걷고 있다가 갑자기 웃음이 났다. 13센치되는 힐을 신고 발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그냥 웃었다. 한 번 웃으니 더 웃음이 났다. 웃으면서 걸어갔다. 한 손에는 토트백이, 한 손에는 노트북이 무거워서 활기차게 손을 흔들진 못했는데, 마냥 웃으니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힘들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두 번째 목적지에 도착했다.


2. 인지의 필요성

놓치고 있는 시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사실 냉정하게 말하면 놓치고 있는 시간들이 맞다. 외면하고 있는 시간들이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 이런 외면하고 있는 회색빛의 시간들이 한 색, 한 색, 달라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모든 시간들이 예쁜 색으로 채색되려면 아직은 멀었다. 아직도 멀었다. 그건 어누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냥 내 마음가짐일 뿐이다.


3. 기억의 조각

오후 다섯시였나. 갑자기 생각나지 않길 바라는 음악이 생각났다. 얄밉게도 옵저버로 미니맵을 밝히듯 한 마디, 한 마디가 밝아졌다. 그 곡을 듣고 싶어하는 무의식이 뺀질대고 있다. 뺀질뺀질 너무 심하게도 뺀질댄다. 그만 뺀질대도 되는데. 뺀질대지 말아야 하는데. 어찌 할 수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아는 한숨만 깊게 내쉴 뿐이다.


4. 어느 시점들에서는

그렇게 할 수도 있구나, 라는 이해심과 그럴 수도 있었구나, 라는 놀라움과 그건 정말 아닌 것 같았어, 라는 조소와 그래서 이제 맞는 걸까, 하는 회의감과 왜 그러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와, 그럴 수 밖에 없겠구나, 라는 합리화와 그렇게 밖에 못했던 걸까, 하는 서운함과 삶에 대한 더 깊어진 딜레마와 혼란스러움만이.


5. 타성

정확히 무엇인지 형용하기 힘든 찌꺼기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이 되고, 그대로 굳어져 버리고.


6. 넌 왜

넌 나를 보면 왜 환하게 웃으려고 노력하는 걸까. 그리고 너는 왜 나를 보고 그런 무표정을 짓는 걸까. '굳이'라는 말은 왜 싫어하는 걸까. '해준다'라는 말은 왜 또 싫어하는 걸까. 나는 너에게 어떤 사람인걸까. 넌 왜 나에게 그렇게 이야기했을까. 왜 그렇게 붙잡고, 또 붙잡았을까. 너는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나는 너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7. 시간의 속성

항상 시작이다. 늘 시작이다. 매 순간이 시작이다.

도중도, 끝도 없는, 언제나 시작일 뿐이다.



-Hee


'선배 잘 지내요? 이게 뭐에요 (하하)'



정말 오랜만의 휴일날,

친구 세명에게 추천하면 한편을 무료로 보여준다는

100원을 아끼자고 보낸 스팸에도 답장이 왔다.


'응 잘 지내지 (하하) 이상한 스팸같은거 보내서 미안해 덕분에 한 편 잘 봤다 야'


그리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는다.

서로가 알게된 것이 나는 막 복학을 한 스물 네 살, 스물 다섯 즈음이고 그 친구는 스무살이었는데

이제 벌써 서로의 나이가 스물 여섯과 서른이 되어있었다.


'선배는 여전하네요. 선배 그때 완전 스티브잡스 같았어요. 면접 때 나한테 했던 질문도 다 기억나는걸?'


응? 6년전인가 그때의 나의 모습은 어땠지..

나는 기억도 못하는 나의 모습을 누군가는 기억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이따금 시간과 시간이 일종의 계단처럼 단계적으로 나뉘고

그 이전 단계의 기억은 가물가물하게 되곤 한다. 뚝 뚝 끊어지는 기분이랄까.

게다가 끊어진 기억으로부터 생기는 상실감은 나를 힘들게 한다.


고비고비마다 이사를 해버린 탓이야..

그렇게 나의 문제를 세상탓으로 돌려버리고는


'그래서 배우자와 가족이 필요한 것일까?'

생각해본다.


기억의 끊김 없이, 함께 서로를 소중하게 기억해줄 사람.

그렇게 애태워 본다.



-Cheol


아직까지도 남아있다는 게, 버려진 것인지 아껴둔 것인지 분간이 어렵고. 그래서 다시 남겨져버린다. 가끔 생각은 하지? 삶은 밤을 건네며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오는 말이 사실은 따갑다. 떠나는 사람이 남겨진 걸 돌볼 여력 같은 거 없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하고도 언젠가 서늘하게 돌아서던 내 모습을 꿈에서처럼 되풀이했다. 모기가 앉은 자리에도 어김없이 발간 자국이 부푸는데 하물며 사랑했던그때 서로에게 남긴 것들은 어떤 형태로라도 긴 여운이 된다. 남겨뒀다고 그대로 남아있을 리 없는데, 내게는 혹시 아픔을 남겼을까 떨치지 못하는 미안함이 시간이 흐르고도 그대로 남았다. 남겨두었다.

그래도 간간이 생각날 거다. 당연히 그렇겠지. 다 마시고 난 뒤에야 잔에 남은 온기로 말라버린 커피에서 가장 짙은 향이 남는다. 낯선 우리 모습에는 그런 온기가 있었다. 건조하고 뜨거운 말속에서 지우고 싶기도 남겨두고 싶기도 한 향이 깊숙이 남겨졌다.



-Ho


2016년 10월 2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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