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면"

도란도란 프로젝트 - 백 마흔 여덟 번째 주제

by 도란도란프로젝트

눈을 뜨면 이상하게도

네가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아득한 꿈에서는

너와 걸었거나 다투었던

순간들이 겹겹이 포개어져

눈을 감아도 네가 보이는 듯 했다


그 찰나가 꿈이라면

깨어나는 순간은 악몽일지도 모른다


오랜시간 너를 붙잡고 싶어서

베갯잎을 부여잡고

며칠을 잠들어도 좋았다


허공에 시선을 아무렇게나 던져도

네가 남긴 추억들만 맞닿아서

눈 끝이 아려왔다


이제 눈을 뜬 세상에 네가 곁에 없는 것이

꿈인양 싶다


해는 떠도 지지 않는 세상에서만

너를 만질 수 있다는 게

눈을 뜨기 두려운 이유인가보다



-Ram


1. 생채기

아무 생각없이, 어떠한 의욕의 한 줄기 없이 아침에 눈을 떴던 적이 있었다.

눈을 뜰 때마다 싫고, 좋고의 감정에서 더 많이 나아가

조금 더 무뎌진 마음으로 현실을 애써 회피하며,

지금보다 더 마음이 다치지 않게 꽁꽁 무뎌짐으로 동여매며,

하루를 시작한 적이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런 시간들도 결국 끝이라는 것이 정승같이 기다리고 있었으며,

무뎌짐으로 꽁꽁 쌓인 마음은 더이상 풀리지 않은 채 그렇게 그런 시절을 맺었다.

시간들이 묵묵히 쌓여갈수록 마음의 앙금도 더 단단해져만 갔다.

그런 앙금들이 혹여나 지금도 남아있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이 스쳐가지만

굳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생각에 그 앙금들을 들여다보지 않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없어지는 앙금이길 바라며.


2. 만성

눈을 떠보니 지하철 플랫폼에 있는 의자 위에 누워 있었다.

저혈압으로 인해 쓰러진 나를 누군가들이 의자로 데려다 준 것이다.

나는 사람이 많은 전철(이 가장 적합한 예다) 등 환기가 되지 않는 곳에 장시간 서 있으면,

피가 머리 끝까지 돌지 않아 저혈압으로 인해 쓰러지는 만성적인 병이 있다.

그래서 일부러 예전부터 사람이 많은 전철 시간 대는 피하고,

사람이 없는 시간대에 맞추어 훨씬 일찍 나가거나, 늦게 나가는 버릇이 있다.

그 날은 어쩔 수 없이 급행을 타느냐고 사람이 많은 전철을 탔는데,

어김없이 저혈압이 왔다.

순간적으로 만약 전철에서 쓰러지면 어김없이 용산까지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꾸역꾸역 참고 참아 수원역에 도착하여 전철문이 열리자마자 한 발을 밖으로 내딛고 바로 의식을 잃었다.

그렇게 그 날 오전을 날리고, 너무 화가나 정신차리고 내과를 찾아갔다.

심전도 검사 등 여러 검사를 한 끝에 나온 결론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펌프질 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약해서 머리 끝까지 피가 안가는 것이라고.

예방법은 없냐고 물어보니, 예방하는 방법이나 약은 없고, 그냥 만약 그런 저혈압증세가 일어나면

무조건 어디든 드러누워서 머리끝까지 피가 통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한다.

그 후로 나는 드러눕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조심하여 몸을 사리며 다니고 있다.

사람 많은 전철은 정말 싫다.



-Hee


반지하라고는 하지만 오후가 되면 꼬박꼬박 햇살이 비치는 창문이 있고

한쪽 벽면을 두르고 있는, 네 개의 문짝 중에 하나는 전신거울인 하얀 옷장이 있고

양팔 한 가득 수건들과 빨래 감들을 널겠다고 펼쳐져 있는 빨랫대가 방안에 있다.


이 모든 것이 가지런히 정리되어있을 때에 고요하게 눈을 뜨면,

창 밖의 건너편에서 건물을 공사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학교를 등교하는 학생들과 출근길을 나서는 직장인들의 구두 굽 소리가 들리고

집 앞마당을 정리하시는 이웃 주민의 빗질 소리도 들려오곤 한다.


아주 잠깐의 틈이지만 위닉스의 하얀 공기청정기를 틀어놓고 이케아침대에 누워서

시리(Siri)에게 시간과 날씨 등 소소한 것들을 묻기도 한다.


피둥피둥 찐 살은 잘 빠지진 않지만 그렇게 나의 아침은

내가 스스로 얻어낸 것들에 대한 보람이 묻어 있다.


내 손을 거치지 않은 물건이 없는 내 방은 그렇게 의미 있다.

절차탁마라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일들에 더욱 매진할 뿐이다.



-Cheol


1.

물 데워 커피를 한 잔 내려 마시기에 6시 반은 너무 이른 시간이다. 더구나 겨울에는 깜깜한 새벽하늘일 테고. 더더구나 눈곱도 못 뗄 만큼 얼떨떨한 영문이겠고. 왜 늘 양치와 다른 무언가를 동시에 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아침은 어수선하냐, 생각했을 때는 이미 왜 그런지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조금 더 느긋하고 고상하고 싶은 방법은 도무지 돈 말고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2.

백화점 구경하러 가자 말하면서 지갑에는 추석 때 받은 상품권 챙겨 넣는 모습이 드디어 뭐라도 살 것 같았는데, 역시나 엄마는 빈 손으로 돌아왔다. 가디건이 예쁘다며 들어가서 가격에 흠칫 놀라 얼른 나가자고 보채는 모습이 괜히 안타까웠다. 어휴 한겨울에는 입지도 못하겠네, 이건 젊은 아가씨들이나 입는 옷이지, 예쁘긴 한데 다른 곳도 좀 가본 다음에 사야지. 백화점까지 가는 동안 이제 우리도 몇 만 원 하는 티셔츠 아무렇지 않게 사 입을 수 있다고 농담처럼 말했는데 아무래도 엄마에겐 그 말이 진짜 농담이었나 보다. 몇 번을 이런저런 핑계로 돌아 나와서는 그게 부끄러웠던지 얼른 볼 일 보러 가라고 나를 떠미는 말도, 시장에서 아무거나 사다 줘도 잘 입는다는 아빠의 고약한 말도, 고작 30만 원에 1주일이나 망설이던 나도, 죄다 애처롭기만 하다. 아무쪼록 가디건이 직원 말처럼 잘 어울렸으면 좋겠다.


3.

7년 전에도 폐업 전 창고 정리 세일 현수막 걸려있던 자리에 지금도 똑같이 구린 옷들 널브러져 있었다. 그 처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별 수 없이 살고 있는 우리 집이랑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조금 옆에 공구가게 즐비하던 전포동 골목은 몇 년 새 20억 넘게 땅값이 올랐는데도. 쓰레기 나뒹굴고 매일 밤 소란하기는 거기나 여기나 매한가지인데도. 기름냄새 짙게 밴 아재들이야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새 인생 인심 좋게 쥐여주니 얼마나 좋겠냐만, 서면 굴다리 넘어 빈민가처럼 후미진 골목에 사는 나는 괜스레 터를 잘 못 잡은 할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매일 아침 눈 뜰 때마다 집값이 올라있는 기분이 어떤지 참 많이 궁금하다. 그보다 몇십 년 해 온 일을 그만둬도 괜찮을 때, 어쩌면 그만두고 세를 내어 줘야 더 큰 돈이 들어올 때, 그 기분이. 사실 궁금하다기 보다 그저 부럽다. 우습지만 요즘 내 모든 생각은 돈으로 수렴하고 있다. 내일 눈 뜨면 복권이라도 당첨돼있었으면 좋겠다.



-Ho


2016년 11월 6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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