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

도란도란 프로젝트 - 백 오십 아홉 번째 주제

by 도란도란프로젝트

실패라는 꼬리표가 두려울 때

한국을 도망치듯 떠나서

유럽의 어느 시골로 숨어들었다.


한국에서의 내 일상은

궁금해하지도 않는 불특정 다수에게

벗겨지듯, 게으름을 비난받고 있던 차였다.


그곳에서 나는 어쩌면 실패자였고

혹은 겁쟁이였다.


그리고 새로운 땅에서

머리 흰 할머니가 건네는

홍차 한 잔에야

나는 위로받았다.


붉은 찻물에서

어른의 향기가 났다.


이런 것이 그리웠던 것이다, 나는.


오점을 물어뜯으려 기다리는 군중보다

그냥 가만히 내어두는

기다림이 필요했던 것이다.


공허함을 메우듯

매일 홍차를 마셨다.


길고 긴 도망침이 끝나고

여전한 한국의 땅을 밟은 후에도

나는 매일을

홍차로 적시고 있었다.


홍차는 어른의 향기가 난다.



-Ram


1. 그녀의 존재

요즘 읽고 있는 책의 남자주인공은 홍차를 파는 카페 자주 간다.

그 남자주인공은 홍차카페의 예쁜 여자주인이

자신에게, 특히 자신이 여자인 친구들 데려오는 날에는 더더욱 자신을 대하는 표정이 좋지 않다고 느낀다.

남자주인공이 느끼기에 그 카페주인의 자신을 대하는 표정이 너무 티가 많이 나는 것 같아,

언젠가 한번 꼭 나에게만 왜 그러는지 물어보려고 하지만,

곧 자신에게 들이닥친 다른 관계들때문에 그 홍차카페의 여자주인은 금새 머릿 속에서 잊고 만다.

난 사실 남자주인공과 실제 여자주인공의 결말도 궁금했지만,

남자주인공과 홍차카페의 주인사이의 결말이 더 궁금했다.

왜 홍차카페의 주인을 그렇게 묘사했을까.

사실 남자주인공이 그녀의 관심을 내심 받고 싶어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그 카페주인은 남자주인공이 누구와 함께 동행하던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그 카페주인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건 순전히 그 날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결국 그와 그녀사이는 책의 내용에서도 잊혀졌다.

책이 에세이인 것을 감안해 (실제로 내가 아는 장소도 종종 등장했다) 그 홍차카페를 검색해봤으나,

그 곳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 아니였다.

사실은 소소한 동네 카페였는데 각색을 한 걸까?

아니면 짝사랑하던 직원이 근무하던 프렌차이즈 카페였을까?

괜한 책 속의 관계가 궁금해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2. 노란색의 그 홍차

하루는 친구가 싱가포르에 다녀오면서 홍차를 선물해줬다.

유명브랜드의 홍차였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뭐 홍차가 별건가,

그냥 향만 조금 나고, 맛은 떨떠름한 그런 차겠지,라고 생각했었다.

며칠 뒤 찬바람이 불자 친구에게 받은 홍차 생각이 났다.

그래서 물을 따뜻하게 데우고, 홍차 티백을 꺼냈다.

티백이 순식간에 우러나면서 엄청나게 달콤한 향이 퍼졌다.

생각지도 못한 향에 놀랐고, 향이 너무 좋아서 한동안 킁킁대며 일부러 더욱 향을 맡았다.

그동안 제대로 홍차를 알지 못하고 단정지었던 내 마음 속 한 켠이 괜히 뜨끔했다.

그리고 바로 친구에게 이 홍차 정말 맛있다고, 향이 정말 좋다고, 찬사를 보냈다.

햇살이 바스러지길 바라는 것만 같은 찬바람이 부는 오늘같은 날, 그 홍차의 향이 그립다.


3. 허브티를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출근 전에는 꼭 카페를 들려 커피를 사는데,

내일은 커피대신 차를 주문해야겠다.

허브티보다는 과일향나는 홍차가 훨씬 좋은데,

아침에 들리는 그 카페에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 과일향나는 홍차가 없으면,

아마 난 아쉬운대로 밀크티를 주문하겠지.


4. To buy

먼 훗날 나만의 살림살이를 사는 날이 온다면 아주아주 예쁜 티팟을 살 생각이다.

예전에 우연히 인터넷에서 정말 눈이 번쩍 뜨이는 티팟을 본 적이 있었다.

자잘한 꽃무늬 패턴과 물결무늬 장식이 앙증맞게 있던 티팟이였다.

더 다양한 티팟을 보고 싶어서 검색해봤는데 사고 싶은 티팟이 수두룩했다.

그 날은 종일 티팟만 검색하고, 가격에 놀라고, 나중을 기약하며 씁쓸하게 창을 닫았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꼭 예쁜 티팟세트를 사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맛있는 홍차를 따라줄테야.



-Hee


이번 주는 개인 사정으로 휴재합니다.



-Cheol


1.

알아낼 수 없는 표정을 마주한 날이면 주눅이 들고 조바심이 나면서도 다시 그 표정을 대면하고 싶었다. 사람을 읽어내는 색인을 얼마나 더 많이 갖추었는지, 그런 것과는 무관한 일이다. 표정이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 다시 보고 싶은 스스로의 마음이 가진 의도가 무엇인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앞으로 얼마간 자주 보게 될 그 표정을 아마도 사랑하게 될 걸 직감한다.


2.

돌아서면 시간을 힘껏 붙잡았던 대화가 이미 낡아 있었고 집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마음은 혼자서 소란했다. 익숙해진 것들은 아무래도 지겨워지는 법일까. 어느 때보다 아늑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는 모든 게 권태로웠고 남몰래 도망치고 싶은 생각에 자주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괜스레 분위기가 그리웠다. 공간을 그득 채우는 말들의 의미가 낱낱이 새롭고 익살맞은 장난이 퍽 재밌던 때. 소파의 팔걸이가 매끄러워 괜히 좋고 처음 맛보는 음식마저 맛있어 더 좋았던 날들의 분위기가 지나치게 그립다. 가본 적 없는 곳을 여행하는 사람의 시선처럼 모든 게 풍경으로 쉽게 지나가던 그때에 나는 썩 용감했고 씩씩했는데.



-Ho


2017년 1월 22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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