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백 아흔 네 번째 주제
다시금 돌아보면 전부
눈에 빤히 보이는 것들이었다.
전혀 바쁠일 없다던 하루,
함께 와보고 싶었다던 예쁜 가게들,
괜스레 남는 시간,
근처의 어딘가에 머무르는 우연들.
의도가 다분한 행동들이었다.
그럼에도 그 우연을 뿌리치질 못했다.
달콤한 향이 나는 그런 의도를
뿌리치고 달아나기엔
내게 부족한 것들이 너무나 많았으니까.
누군가라도 양껏 속삭여주는
사탕발림을 핑계대며
어딘가에라도 안겨야만 했으니까.
내심,
우연에 기대어 날아가고 싶은 날이 많아서.
-Ram
1.
내가 지금 일A와 일B를 진행하고 있는데, 일B가 일A보다 재미있고, 배울 것도 많아서 더 많이 하고 싶어 하는 것 뿐인데, 반대로 일A를 하기 싫어해서 일B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선이 있다는 것에 놀라웠다. 사실 난이도로 따지면 일A가 훨씬 내겐 쉬운데. 편한데.
2.
하고싶다고 생각한 것은 성격이 급한 탓에(누군가는 실행력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 그냥 하고 싶은 마음이 크고 성격이 급한 것이 맞아떨어지는 것일 뿐)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바로 해버리는데, 시점을 언제해야겠다고 구체적으로 생각해 둔 것이라면, 당연히 그 때 하는 것 뿐인데. 누군가에겐 그것이 나의 강박으로 여겨진다는 것에 놀라웠다. 사실 그 이야기를 한 그는 한 번 정한 약속은 전날 바꾸기 십상인 성격을 가져서, 몇 번이나 그 변덕에 기와 혀를 찼었다. 그런 그에게 내 성격은 강박인가보다.
3.
살다보니 의도가 빤히 보이는 상황들을 마주친다. 진심인척 위장하며 다가오는 노력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지. 알맹이도 없이 껍데기만 다가오는 바보들. 나는 사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잘 믿는 편인데 (그냥 누군가를 의심하는 건 피곤해) 의도가 빤히 보인 채로 웃으면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몇 번 겪다보니, 마음을 여는 일이 조금씩 조금씩 어려워진다.
4.
그럴 의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그렇게 오해해버리면, 마음이 불편해서 어떻게든 오해를 풀려고 했었던 때가 있었던 반면, 한편으로는 왜 나를 그렇게 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은 걸까, 라고 생각하며 도리어 나도 기분이 상해서 오해를 더이상 풀 노력을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근데 우습게도 결론은 전자였던 상황이든, 후자였던 상황이든, 나와의 인연이 오래 지속되진 못했다.
-Hee
회의실 안에서 한 사원이 적극적으로 발제를 시작한다.
"기존 서비스들은 사용자의 수요에 대한 해법으로 대량화에 초점을 맞춘 문자 기능만을 제공하였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대량 발송 방식으로 최근 서비스의 모습들은 기술 환경 변화에 따라 그 양상도 변해가고 있죠. 대표적인 사례로 A서비스는 고객의 방문, 행동, 특성별 맞춤형 문자 홍보나 이벤트를 제공하면서 소비자 관계에 기반한 마케팅 기법으로 전통적인 방식과 차별화를 이루어냈습니다." "우리 서비스도 이러한 차별화의 방향을..."
"아니, 거기까지만 하지." 사원의 의도는 그것을 미처 드러내지도 못한 채, 그렇게 한 사람의 한마디에 의해 거침없이 빗나가고 있었다.
"이거 그냥 타사들이 하고 있는거를 종합적으로 제공하면 되는거 아냐"
모방. 단순. 심플. 효과적. 그런 것일까.
"기존 업체들이 하고있는 방식이 있으니까. 그대로 따라가는게 좋을 것 같아. 기존 서비스들이 하는거 다 한다고해야 우리것도 가능성이 있을거 아냐. 안그래?" "그림만 좀 이쁘게 잘 그려봐. 내가 그림 이쁘게 그리는 능력이 없어서 부탁좀 해도 되겠지?"
도대체 얼마나 단순한 것일까? 아니지, 이렇게 단순해야 시장에서 먹히는 것일까? 어쨌든 이 개발건은 성사시켜야만 했다. "알겠습니다." 사원의 역량이 부족한 것이겠지. 그 사람이라면 분명 의도대로 설득할 수 있었겠지? 내 성장과 도전의 곁에서 나는 항상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거울에 비치는 것은 내 모습이 아닌 그 사람의 그림자였다. 그 사람은 항상 선의의 경쟁자로 그 거울에 서있었다. 어찌보면 그저 한명의 사람일 수 있다. 어찌보면 단지 종이 한 장 차이일 수도 있다. 어찌보면 그냥 한 때의 빛남일수도 있다. 다만 여전히 빛나고 있다. 사실 계속 그렇게 빛나기를 바라고도 있다. 나 역시 다른 빛깔로 '함께' 빛나보고 싶다.
그저 오늘도 나홀로 경외감을 가져볼 따름이다.
-Cheol
점심을 만들어 먹고 수목원을 잠시 걷다 헤어진 평범한 날에도 네가 남긴 여운은 너보다 거대하고 난폭해져 혼자 남은 나를 짓눌렀다. 네가 떠나고 난 집에 남겨진 허전함이 나른하게 나를 반겼다. 미뤄둔 설거지를 하고 네가 앉았던 의자에 가만히 앉아 너를 생각한다. 너는 무슨 바람으로 내가 사는 먼 곳까지 왔고 나는 왜 굳이 점심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을까. 끈질긴 볕을 피해 도망치듯 수목원을 떠나는 너는 왜 그렇게나 가련하고 나는 그런 너를 어째서 좋아하고 있는지. 오래 생각해도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보다 너와 함께 있는 내가 어마나 행복한지 조금 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네 앞에 나는 매번 여유를 잃고 지나치게 평온해지는 경향이 있지만 너를 계속해서 만나야만 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너와 너를 만나는 나의 행복을 위해서. 나는 아직 조금 더 행복하고 싶다.
-Ho
2017년 9월 24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