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열아홉 번째 주제
빠른 시계
우리집에는 방마다 벽에 시계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는
단 하나도 없었다.
언제나 5분 혹은 10분 정도 빠르게 맞춰져 있었다.
늘 아침에 눈을 뜰 때면
남들보다 빨리 지나가는 우리집 시계가 야속하기만 했었다.
머리 속에는 시계가 몇 분이나 빠른지 이미 세고 있고
현재의 정확한 시간을 잴 수 있으면서도
눈으로 보는 시계의 시간을 무시할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5시임을 알면서도 시계가 5시 10분이라면
왠지 지금이 5시 10분 같은 느낌이랄까!
그렇게
10분 정도 나이를 빨리 먹은 나는
집을 떠나 홀로 살기를 시작하면서도
방 안의 시계를 몇 분 정도 빨리 맞춰두며 살고있다.
시계를 빨리 맞춘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가 있거나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손톱을 물어뜯는다거나
눈을 자주 깜빡거리는 것과 같이
그저 사소한 습관의 일부분인 것이다.
어제였던 하루가 벌써 오늘이 되고
또다시 금새 내일이 되는,
해와 달이 바뀌는 경계에 무뎌지며
살아가기 시작할 때
10분의 여유를 갖기를,
10분 먼저 기다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기를
우리 엄마는 내가 그러한 딸로 자라기를 소망하셨는지도.
-Ram
어느 날 우리 집으로 익명의 택배가 배달되었다.
뭘까.
굉장히 작은데.
흔들어 보니 뭔가 있긴 있다.
필통에서 커터칼을 꺼내 박스를 꽁꽁 싸고 있는 테잎들을 죽죽 그어 뜯어낸다.
그 안에 작은 시계가 나온다.
옆에 편지봉투가 있다.
오잉, 뭐지? 하면서 편지봉투를 열어 편지를 읽어본다.
‘시간이동을 할 수 있는 마법의 시계’ 라고 쓰여있다.
그 시계는 대략 이렇다.
만약에 지금이 2014년 5월 14일 0:00시라고 해보자.
내가 5월 13일 12:00로 돌아가려면 반시계방향으로 한바퀴만 돌리면 된다.
만약 2014년 5월 1일로 돌아가려면 반시계방향으로 두바퀴씩 돌리면 하루 전이 되니까,
26바퀴를 돌리면 2014년 5월 1일 0:00시로 이동하겠지.
이와 반대로 시계방향으로 돌리면 미래로 가는 거라고 치고.
이런 수고스러움을 이겨내며 내가 어떤 순간으로 이동하고 싶을지 생각해봤다.
음..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을까?
어릴 적에 인형을 가지고 놀지 않았으니, 다시 7살로 돌아가서 엄마한테 인형을 사달라고 조를까?
초등학교 1학년때 이사를 가는 바람에 친했던 친구랑 헤어지게 되었는데, 지금은 얼굴과 이름이 전혀 기억나지 않아 아쉽다. 그 친구를 다시 만나볼까?
중학교 3학년때 공부에 조금만 더 욕심을 내어 특목고를 갔다면 나는 버틸 수 있었을까?
고등학교때 내가 수능을 봤다면 조금 더 좋은 학교를 갈 수 있었을까?
만약 경영학과가 아닌 다른 학과를 갔다면 지금과 다른 어떤 이들을 만났을 테고, 지금과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아니다. 아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이니 미련이 없다.
그렇다면 미래로 가볼까?
작년 이맘때쯤의 나는 완전 재밌게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럼 내년 이맘때쯤엔 뭐하고 있을까?
음 아마 내 예상에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 남은 전공학점을 신나게 채우고 있지 않을까, 하는데. ㅋㅎㅎ
10년 뒤 이맘때쯤엔? 결혼을 했을까? 그렇다면 나랑 같이 아침을 먹고 있는 사람은 누굴까?
혹시 외국에 있진 않을까? 나중에 외국에서 꼭 한 번 살아보고 싶은데. 아주, 말고 몇년만.
30년 뒤에 내 모습은 어떨까? 주름이 많이 져 있겠지? 어떤 엄마가 되어있을까?
아, 혹시 엄마가 안되어 있을지도….?
50년 뒤에 지금 나의 부모님은 살아계실까? 만약 50년 뒤로 시계를 열심히 돌렸는데, 부모님이 안계시면 엄청나게 슬플 것 같다. 매우매우.
물론 사람은 떠나기 마련이지만..
혹시나 내가 범죄의 타겟이 되거나 불의의 사고로 인해, 50년 뒤로 돌렸는데 내가 없으면?
하.. 그것도 엄청 슬플 것 같다.
계속 드는 생각인데, 뭔가 미래를 미리 알고 있으면 엄청난 두려움이 생기거나, 삶의 의욕이 사라지고 아주아주 어쩌면 폐인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특정한 한 사람이 이런 시계를 가지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만약 모든 사람들이 예견 할 수 있다면,
미리 앞을 내다 볼 수 있게 된다면,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의미가 있을까?
신은 머리가 정말 뛰어나다. 인간에게 미리 미래를 보지 못하게 하여, 내일의 희망을, 내일 모레의 희망을,
내년의 희망을, 미래에 대한 막연하거나 구체적인 희망을 가지게 했으니 말이다.
그로 인해 삶의 의욕, 미래에 대한 비전과 목표, 생에 대한 동기를 부여받을 수 있게 되었고,
인생을 굉장히 재미있고 흥미넘치게 살아갈 수 있게 되어 행복하다.
-Hee
1. 그렇게도 함께 타보고 싶었던 밤기차를 탔다. 함께였다면 좋았겠지만, 혼자인 것도 나쁘지는 않다. 혼자라는 것은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 오롯이 하나일 때 그 것은 오롯이 자유로워진다. 그렇게 자유로운 마음으로 내가 생각하고 싶은 당신을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있다.
2. 밤기차를 탔다. 다섯 시간에 걸친 서울발 부산행 무궁화호 열차이다. 원래의 의도는 기차에서 푹 한 숨 자는 것이었지만, 창 밖의 풍경들이 지나가는 것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쓸데없는 생각들이 함께 스쳐 지나간다.
3. 기차역 하나하나를 지나칠 때마다 가장 나의 시선을 끄는 것은 서로를 마주보고 해맑게 웃고 있는 연인들을 볼 때이다. 내가 바랐었던 그런 모습.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이내 기차는 그런 모습의 기차역을 뒤로하고 출발한다. 나 역시 그러한 생각은 뒷편으로 넘겨버린 채 이내 창 밖을 쳐다본다. 창 밖은 어둡고, 가로등의 노란 불빛들이 저 멀리 별들처럼 반짝이며 지나간다. 그리고 아주 잠깐 나에겐 허락되지 않을 상상을 해본다. 이 기차가 시간을 거슬러 흘러가는 기차였으면 좋겠다. 아니,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이란 건 없다. 단호하게 자신을 다그친다. 함께 보았던 뮤지컬‘영웅’에서 달리는 기차 장면이 생각난다.
4. 나의 마음의 감정들을 모두 다 받아 줄 필요는 없다. 이러한 생각들조차 못하도록 나는 더욱더 바쁜 삶 속으로 나를 몰아넣는다. 그 어느 누구도 생각할 그리고 그리워할 틈이 없도록 치열한 삶 속으로 나를 몰아넣는다. 내면의 아픔을 외면의 육체적인 불편함으로 가려본다. 그래, 나를 더 바쁜 삶 속으로 밀어 넣자. 하지만 그러한 삶 속에서도 나의 감정은 빈틈을 찾아내어 비집고 나와 한바탕 내 가슴에 소나기를 쏟아내기 일쑤다. 쓰러질 것만 같은, 홀로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날들이면 어김없이 비가 내리곤 한다.
5. 생각해보니 시계의 초침과 분침 그리고 시침까지도 모두 제자리를 빙글빙글 돈다. 1에서 출발하여 12까지 지나고 나면 다시금 1로 돌아가지. 그녀도 여러 숫자들을 거쳐 다시금 1로 돌아올 수 있는 걸까.
하지만 그럼 내 시계는?
그녀의 사랑이 돌아오는 12시간과 나의 12시간은 다르다.
그래, 우리들의 마음시계는 이미 각기 다른 시간들을 살아가고 있다.
-Cheol
selfish 2
Pm. 6:32
시계가 멈췄다. 왜 그랬는지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다. ‘탁’하고 무언가 끊어지는 그 소리.
목소리를 들은 지 열흘이 지났다. 상대의 적극적인 애정표현에 당황한 나는 의도적으로 그 아이를 피하고 있다. 싸운 것도 아니고 무서운 것도 아닌데, 어디선가 느껴지는 희미한 불편함에 나는 우리의 관계와 사랑의 정의를 반복해서 생각했다. 막상 만나면 잘 만날 거면서. 그렇지도 않은가? 연애는 무엇이며 사랑은 또 뭔지,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무엇인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고 그 상태로 그 아이를 만난다는 것에 죄책감이 들었다.
“미안해. 내가 너무 닦달했나봐. 너무 급작스런 시작이었잖아. 아무나 붙잡고 연애라도 해보라는 말에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거니깐.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야. 이렇게라도 다시 시작한 건 잘했어. 잘했는데 그래도 진지하게 시작한 상대에게는 상처가 되니까. 음… 그럼 나쁜 건가?”
앞에 날 앉혀놓고선 횡설수설하는 친구를 보며 나는 그날의 우리를 떠올렸다. 그 아이는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두들기며 조심스레 자신의 마음을 전했고, 나는 호감이 없었다면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답했다.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처음 만나는 그 아이를 나는 애써 익숙한 척 받아들였다. 거짓을 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서두르는 기분이다. 간절함과 갈증이 커서 밀려오는 감정들을 모두 받아낼 수 있을 줄 알았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사랑의 확신이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 갈증 정도로는 어림도 없던 거였어.
다시 연애를 시작하게 된 나를 친구들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맞아주었다. “원래 이런 기분이야?” 하며 이 감정이 사랑인지 잘 모르겠다는 내 이야기에 다들 그렇게 시작하는 거라고, 오랜만이라 감 떨어졌느냐며 놀려댔다. 그때는 사랑을 시작했다는 두근거림이 컸다.
“어쨌든! 빨리 정리하는 게 좋을 거야.”
‘언제는 팍팍 만나보라더니… 이미 헤어지는 걸로 결정 난 거야?’ 내 속은 모른 채, 진지한 표정으로 충고하고 있는 그녀에게 작은 서운함을 느꼈다. ‘이 감정이 사랑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 호감을 느끼고 있다고!’ 연락하지 않았던 내 잘못이 크지만, 이제는 먼저 연락할 용기도 나질 않는다. 매번 그랬다. 결정적 순간에 나는 주저한다. 그 아이가 보낸 장문의 글을 읽었고, 그 글을 써내려가는 모습이 아른거린다. 나는 왜 그 마음에 답하지 못하는 걸까. 생각이 많으면 연애도 못 한다더니 사실이었어.
Am. 02:47
시계를 보았다. 그 아이는 하루에 몇 번이나 시간을 확인하고 전화가 울리길 기다렸을까. 사라지지 않는 숫자 1이 야속하고, 매번 대신 대답하는 딱딱한 그녀의 목소리에 왈칵 눈물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가 남긴 흔적들을 하나하나 읽어내려간다. ‘그랬구나. 내가 잘못했어. 변명은 안 할께.’ 다시 긴 편지를 써보지만, 마지막 이야기를 채우지 못하고 포기한다.
‘좋아하는 감정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커지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누군가는 유통기한을 만년으로 하고 싶다고 이야길 했지만, 멈춰버린 내 시계로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그 아이를 힘들게 하겠지. 그 아이가 느끼는 시간과 내가 느끼는 시간의 차이를 처음에는 몰랐지만, 미묘하게 어긋난 무언가를 느끼고는 있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세상을 살고 있었던 걸까.
-Min
2014년 5월 18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