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이백 마흔 두 번째 주제
서로 아무 말 없이
손에 쥐어진 것만 깨작거리길
몇 분 째였다.
같은 공간,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서로 다른 것을 보는 우리가
불쌍해보였는지,
테이블 위의 컵이
어떤 과학 법칙에 의해
툭, 하고
그대로 미끄러져 깨지고야 말았다.
우리가 말 없이 보낸 시간이
꽤 길었나보다.
컵 속의 얼음도 녹아버리고,
물이 흥건하게 내려와
그대로 미끄러져 떨어진 것을 보고도
아-
잔뜩 놀란 것은 종업원 뿐이었다.
뭉그적 거리며
자리를 옮기는 너와,
몇 방울 튀어오른 음료를 닦는 나에게
일말의 긴장도, 놀람도 없다는 것이
무엇일까.
깨어진 컵이나
우리의 오늘이나
다를 바가 무엇이냔 말이야.
-Ram
1.
막상 무대 위에 올라갔을 때 보다,
무대 위에 올라가기 바로 직전인 무대 뒤가 더 긴장되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
잘할 꺼면서.
2.
예전보다 넌 너의 세계가 많이 편안해진 듯 보였다.
대화 속에 자신감이 새어 나왔고, 부분부분 여유가 묻어 나왔고, 조금 더 대담해졌다.
너의 달콤한 말들 속에서, 긴장하지 않으면 아무 생각없이 마냥 너의 말대로 널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피어올랐다.
내게 따뜻함과 희망만을 심어주는 너에게 난 무엇을 줄 수 있을까.
3.
아닌척 하면서도, 그러지 않아 보였어도, 사실은 종종 흘러가는 시간에 긴장하고, 새삼 옳지 않은 선택은 아닐까 긴장하고, 대답을 준비하지 못한 질문에 긴장하고. 얄궂은 너의 눈빛에 긴장하고, 시기와 타이밍의 존재를 의심하며 긴장하고, 마음이 들킬까 긴장하고, 넘어지지 않을까 긴장하고, 내가 빠를까 버스가 빨리 올까 긴장하고, 너에게 어떤 답장이 올까 긴장하고, 나의 못난 부분이 보이진 않을까 긴장하고, 새로운 시작에 대해 긴장한다.
4.
무엇을 보고, 듣고, 읽고 자랐냐에 따라
바뀌는 것은 분명 있다.
-Hee
양지바른 햇볕에 잘 건조시킨 이불. 그곳에 엎드려 새근새근 쉬는 시간. 날씨가 더울까싶어 쉬이 쉬이 저어주시는 부채질 바람.
무엇이 그리도 이쁜건지 혹은 걱정되시는건지 쓰담 쓰담 내 등을 연신 쓸어내리는 손바닥의 체온.
모진 세상 풍파 걱정은 하나도 없었던 평온했던 시절.
이내 그 시절은 폭력과 아픔으로 얼룩지고, 무의식중에도 긴장을 풀지 못하고, 낯선 손길에 연신 움찔대는 가련한 이가 되고말았다.
-Cheol
할 말이 있다는 문자를 보내고 잠시 뒤 전화가 오기까지, 당장에라도 치어버릴 만큼 가까이서 나를 덮쳐오는 트럭 앞에 선 것 마냥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나를 생각했다. ‘나 부산으로 가게 됐어. 그래서 말인데 우리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맞는 것 같아.’ 냉정하게 뱉어내려고 연습했던 말도 역시 나오지 않았다. 일단 내일 만나서 얘기하자는 말을 겨우 하고나서 내가 느낀 건 안도였는지, 후회였는지 아니면 둘 다 아닌 무엇이었는지. 태풍이 지나간 뒤 서울은 추웠고 부산은 더웠다. 만나서 우리가 종일 했던 말은 고작 300km 거리, 비행기 타면 겨우 30분 거리, 외국에 가는 것도 아니고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라는 거짓 위안의 말들이었고 바로 다음날 내가 부산에서 느낀 사소한 날씨의 차이는 그런 위안들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거대하게만 느껴진다. 어떡하면 좋을까. 녹색이던 보행신호는 지금 주황색으로 점멸하고 있다. 그 다음은 적색이 될지, 다시 녹색이 될지. 앞에 서서 멍하니 기다리는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Ho
2018년 8월 26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