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이백 쉰 아홉 번째 주제
무엇이든 잘 해낼 줄 알았어.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다 상관없는 줄만 알았단 말야.
너도 나도
사람을 아끼는 것이
처음이라서
그래서 그랬겠지.
무슨 상황이 와도
너는 흔들리지 않을 줄 알았어.
그래도,
그랬던 너와 나도
별 수 없더라.
이만큼
깨어지기 쉬운 약속이
또 있었을까.
이렇게나 쉽게
마음이 둘이 될 줄은 몰랐어.
나약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가여운 마음이 들었던 거겠지.
그사람에게도.
그렇게 익숙하고 조심스럽게
또 다른 마음이 커진 거겠지.
고생했어, 그동안.
-Ram
1.
초등학교 6학년 때였나, 내가 좋아하던 남자애가 있었다. 초등학교때는 남녀구분없이 같이 모여 놀던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그 남자애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지금보다 훨씬 부끄러움이 많았고, 새침했다. 그래서 고백은 커녕, 그냥 같이 놀던 그 시간들이 너무 좋았다. 그러다 마침 뉴스에서 며칠 뒤 몇 십년에 한 번이랬나, 유성우가 비오듯 쏟아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유성우를 그 남자애와 보고싶어서, 그 뒤 학교에 가서 친구들한테, 얘들아 유성우가 떨어진대! 라며 운을 띄웠다. 사실 난 그 남자애하고만 보고싶었는데, 내가 만약 그 남자애한테 같이 보자고 했다가, '그럼 애들이랑 다같이 보자', 또는 '난 졸리니 안볼래' 따위의 대답을 들을까봐 괜히 두려웠다. 그렇게 거절을 당하면 내가 너무 챙피해서 다신 그 남자애를 더이상 좋아할 수 없게 되버릴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그 유성우가 떨어진다는 새벽에, 그 남자애를 포함한 친구들이 다같이 운동장에 모여서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래, 차라리 그게 행복했고 내 감정을 지키는 안전한 방법이였다.
2.
톤다운된 립스틱들이 옹기종기 각을 맞추어 각기의 색들을 뽐내는 것을 보면 저절로 발걸음이 멈춰진다. 새빨간 립스틱, 샛분홍 립스틱도 아니고, 베이지, 진한 베이지, 연한 브라운, 연한 당근색 등 이런 어울리지도 않는 색들에 항상 시선을 빼앗긴다. 하지만 막상 바르고보면 딱히 어울리지 않아 보여 항상 실망한다.
3.
어떤 이는 내게 밥이든, 술이든, 커피든 뭐라도 좋으니 일단 만나자고 했었다. 그 순간 나는, 도대체 이 사람은 나의 어딜 보고 저렇게 말하는 걸까, 의아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얼굴을 보며 이야기했던 적이 단 한 번이였고, 단 둘이 이야기 해 본 시간은 더더욱 짧았기 때문이다.
4.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생얼에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무거우면서도 달콤한 향수를 칙칙 뿌린 여자는 짧은 치마에 높은 하이힐을 신고, 아주 당당하게 집을 나섰다.
-Hee
눈빛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 모습이 가히 하나의 예술작품 같았다.
아무도 모를, 심지어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할 순간.
그 순간을 낚아채 글에 담아보고 싶었다.
살아 숨쉬는 우리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던 순간.
그 순간의 온도
그 공간의 냄새와 향기
주변을 채우는 소리들
다시는 맞이할 수 없을 아련한 우리의 순간.
-Cheol
서로 알게 된 지 고작 오일 째 되던 날에 나연이 했던 말의 의미는 뭐였을까. 쉽게 짐작하고 넘기려 해도 그녀의 꾸준한 연락이 아직까지도 그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녀의 직선적인 단어와 몸짓. 그건 단순히 습관적인 것이었는지, 아니면 섹스 어필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일종의 고백이었는지. 담뱃값이 비싼 나라에서 담배를 한 개비 빌리는 게 얼마나 어렵고 미안한 일인지를 애써 설명하는 그녀에게 아직 한국에서 가져온 게 좀 남았다며 남은 걸 모두 건넸다. 낯선 나라에서 며칠간의 긴 트레킹을 끝마친 날이었고 술에 취한 사람들이 하나 둘 텐트 안으로 들어가고 난 뒤에도 우리는 불 꺼진 화로를 사이에 두고 앉아 담배를 태우며 이야기를 했다. 그녀도 나도 지친 몸에 많이 흐릿해진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나연의 두 눈만큼은 발간 빛을 냈다. 나는 그토록 반듯한 유혹이 두려웠던지, 어린애 마냥 부끄러웠던지 술이 취했다며 나연을 그녀의 텐트로 잡아 이끌며 모른 척 아무런 속내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건 내 나름의 답변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녀의 용기어린 말에 어떠한 답도 하지 못한 겁쟁이의 꼴이다. 다행인지 아닌지 몰라도 다음 주 나연이 부산으로 온다. 서울로 오라는 그녀의 연락을 매번 바쁘다는 말로, 다음이란 말로 거절했었는데 병원으로 문병 온다는 말에는 어떤 핑계도 통하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서른둘 무르익은 여자에게 그런 식의 유혹쯤 크게 이상하지도, 어렵지도 않은 가벼운 일이라고 속으로 짐작해버리고 싶었는데 적어도 다음 주가 지나기 전까지는 어떤 결론도 지을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어떤 경우라도, 어떤 방향으로라도 나는 진심어린 발걸음을 옮길 준비를 해야겠다.
-Ho
2018년 12월 23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