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도란도란 프로젝트 - 두 번째 주제

by 도란도란프로젝트

겨울의 한 구석에서


무슨 계절을 가장 좋아하냐는 바보같은 질문에
나는 곧잘 가을이라고 답하곤 했다.
끝으로 치닫는 춥거나 더운 것이 너무나 싫어
때론 겨울엔 여름을 그리워하고 여름엔 겨울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먼지같은 겨울바람에 여름 냄새를 추억하고 있다.


기억이란 참으로 애매한 녀석이라
멋대로 머릿속을 재배열 하기도 한다.
숨만 쉬어도 하얀 입김이 불어나오는 영하의 방구석에서
숨막히도록 뜨겁고 습했던 여름을 추억하는 꼴이라니.


생각해보면 참으로 웃긴 일이다.


겨울이라는 녀석은 눈, 얼음, 바람같이 그녀석 고유의 것을 기억하게 하면서
여름이란 것은 태양, 습기, 장마와 같은 것이 아니라
여름을 ‘피했던’ 바다 같은 것을 떠오르게 하게 하니 말이다.


딱히 여름을 기다리거나 한 적은 없다


언제나 기다리지 않아도 돌고돌아 여름이 찾아왔고
까만 피부를 걱정하는, 아직도 새초롬한 감성을 지닌 소녀지만
아직은 당당하게 민소매와 핫팬츠를 입는 여대생으로서
딱히 피하려고 해본 적도 없다


여름이란게 그렇다
으르렁대며 달려오지도 않고
그렇다고 슬금슬금 기어오는 것도 아니다.


겨울의 한 구석에서 앙상한 나뭇가지마냥
파르르 떨리는 구름을 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얼굴을 내어주며 빛나는 여름이
어쩌면 좀 더 그리워할 만한 존재이지 않을까.


-Ram


어느 여름 밤이였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나는 아침에도 잘 지냈고, 점심에도 잘 지냈고, 오후에도 잘 지냈다.
물론 저녁에도 잘 지냈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밤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엄청나게 무거운 짐이 내 어깨에, 내 등에, 내 머리위에
올려져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모든게 비관적으로 보였다.
내가 보고, 듣고, 읽는 모든 것들이.
그런 감정들을 느낀 채로는 쉽게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그런 감정들을 가지고 집 대문을 열고, 웃으면서 내가 집에 왔다고 이야기 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집 앞에, 아니 솔직히 말하면 집 앞말고 우리집 옆옆동 앞에 놓인 벤치에 앉아서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들었다.
무슨 노래였는지 까지는 기억이 안난다. 그리 노래는 중요한게 아니였던 것 같다.
그 벤치에서 청승맞게 울어볼까,도 생각했지만 눈물이 아까웠다.
그래서 울지도 않았다.
그냥 멍하게 앞을 보고, 하늘을 한번 바라다보고, 또다시 앞을 보고, 그렇게 앉아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갑자기 앞에 낯이 굉장히 익은 사람이 지나간다.
어?
아빠였다.
아파트 내에 있는 헬스장에 가고 있던 아빠였다.
아빠도 무심코 옆을 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 여기서 뭐해?
라고 아빠가 물었다.
어? 나 이제 집에 갈라고! 아빠 운동가? 얼렁 다녀왕 안뇽! 난 집에간당!
하고 황급히 집으로 들어갔다.
그때 그 여름 밤 하늘엔 별이 참 많았다.


-Hee


한 여름의 비 오는 날. 나는 그날이 좋다. 비 오는 날의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비 오는 길을 걷다가 버스정류장에 잠시 앉아

본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우산을 쓰고 맨발로 걷는 길이 좋다. 그 길이 나만 아는 운치 있는 길이라면 더 좋다. 발끝에 느껴지는 시원함. 나는 왜 그 즐거움을 한 동안 잊고 살았던 걸까. 어린 시절 비가 오면 제법 신이 나서, 첨벙첨벙 친한 친구와 장난도 치곤 하였었지.


어쩌면 우리들은 어른이 되어간다는 이유들로 사소한 즐거움 들을 조금은 잊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회색의 도시 속에 갇혀 살아가는 우리들 속에도, 분명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즐거움 들이 숨어있다는 생각이 스스로 기특하다. 하지만 한 번 잊어버린 하나의 즐거움을 찾아내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 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들에게 어렸을 적 일기장은 그토록 소중한 보물이 되는 이유인 걸까? 마흔 즈음이 되어, 어렸을 적 자신의 소중함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삶이 바뀐다는 내용의 영화가 기억난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곁에 있는 친구들이 더욱 소중해 진다. 때로는 내가 알아낸 즐거움을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그이들이 알고 있는 즐거움을 함께 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들은 잊었던, 혹은 몰랐던 삶의 즐거움 들을 알아가며 어른이 되어가는 것일까?


이번 겨울은 그런 의미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된 행복한 겨울인 것 같다. 처음으로 내가 쓴 책 한 권을 써 낼 수 있었고, 그 즐거움을 알아주는 친구가 생겼고, 그리고 그이를 통해 글쓰는 즐거움을 함께 누리는 친구들이 생겼다. 그리고 또 그이들의 글귀를 통해 새로운 즐거움, 내가 모르는 새로운 삶의 즐거움 들을 내다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들을 얻게 되었으니 말이다.


-Cheol


초여름이 좋았다.


지금은 그 기간이 짧아져서 오래 즐길 수는 없지만, 어린 시절 나는 초여름을 좋아했다. 해가 뜨면 나타나는 연노랑의 빛이나 그와 함께 그늘에서 베어 나오는 그림자의 은은한 푸른 빛이 좋았다. 나무 그늘 아래의 시원함도 좋았고, 햇볕 아래 느낄 수 있는 은근한 더위도 좋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그 더위를 식히는 것은 나른한 봄날의 낮잠과 비슷한 쾌감을 주었다. 쏟아지기 전의 비 냄새는 유난히 진했고, 비 온 후의 공기는 서늘한 가을과는 다르게 따뜻함이 느껴졌다. 초여름만의 공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 시기엔 주로 달빛을 맞으며 산책했다. 그냥 그것이 작은 기쁨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본능적인 끌림일지도 모른다. 많은 것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매일 매일이 새로운 공기는 가볍게 내 몸을 감싸고 선선한 바람과 함께 나에게 들어왔다. 눈을 감아보면 나도 그 공기의 일부가 된 듯한 기분이었고, 초여름의 공기처럼 다양한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고 싶었다. 그 속을 거니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정해진 산책로는 없었지만 꼭 들러 잠시 앉았다 가는 곳은 있었다. 소꿉친구를 따라 다니기 시작했던 성당.


밤이 내린 성당은 고요하다. 새하얀 건물은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어둠 속을 밝히고 있고, 나는 성모 마리아상을 바라볼 수 있는 벤치에 앉는다. 특별한 일을 하지는 않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하늘을 바라보거나 눈을 감고 음악을 듣고, 때로는 마리아상을 바라보며 고민이나 작은 소망들을 이야기한다. 기억 속 신부님의 품처럼 소박하지만 편안한 장소였다. 그 곳에서 그 아이를 만났다.


-Min



2014년 1월 19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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