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이백 아흔 아홉 번째 주제
0.
태풍이 일었다.
그뿐이었는데도,
나는 모래처럼 무너졌다.
1.
지나고 나면 괜찮을 것이라고
얘기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정도 했으면
되었다고 구박하던 찰나였다.
잃은 것은
너 뿐인데
남은 것도
나 뿐이어서 그래.
2.
너는 감정이 불 같았다.
고요한 물길같은 나를
닮고 싶다고 했다.
하여
실은 나도
불처럼 화내고
모질고 못된 여자라고
얘기하질 못했다.
우리가 안 맞는 관계라고
생각해버릴까봐.
3.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깨어지고 부숴진 것들이
남겨졌다.
그 중에
제일 모나게 헝클어진 것은
결국 내 감정 뿐이었다.
너는 꿈 속에서도
나를 모질게 괴롭히니까.
-Ram
태풍이 몇 차례 지나갔고, 강한 태풍이든, 약한 태풍이든 간에 태풍이 끝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그 즈음에 늘 내 존재가 너무 작아 보이는 공허함을 느낀다. 이게 느낄 수 있는 스트레스도 다가오거나, 예민함으로 다가오거나, 매우 짜증스러움으로 다가올 때도 있어 더욱더 나 자신이 나약해 보인다. 올해 초 누군가 그랬다. 올해는 짜증이 아주 많은 한 해가 될 거라고. 다른 모든 말들은 모두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지만, 그 말만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비논리적인 인과관계를 만든다. 태풍의 시발점이 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무 뜻 없는 내가 태풍을 맞자니 억울하기도 하여 이리저리 발버둥도 쳐본다. 앞으로도 태풍이 오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을뿐더러, 미처 경험하지 못한 거센 태풍이 다가올지도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날아가지 않도록 단단하게 대비하고, 안전한 곳을 만들고, 나름대로의 대처 방법을 만들어 두는 것일 뿐. 태풍을 피할 방법은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영영.
-Hee
창 밖으로 강한 바람이 분다. 확실히 집이 없으면 오늘같은 날을 어찌날까 싶다. 도시생활에 익숙해져 미리 예보도 보고 집안에서 보낸다지만 예보도없이 갑작스레 태풍을 맞으면 그것만큼 난감한 상황도 없을 것 같다.
자연현상이 피부로 느껴지니 지구에 그것도 지리적으로 한반도에 살고있다는게 새삼스럽다. 차를 타고 지나는 도로 곳곳마다 태풍이 지나간 흔적이 눈에 띈다. 이따금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태풍을 맞아 꾿꾿히 살아가는 우리도 새삼스럽다.
너무나 당연한 것들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태풍. 뽑인 나무들이나 휘어져 눕어있는 울타리같은걸 지나칠때마다 정말 사람일은 언제 무슨일이 생길지모른다는 경각심도 든다.
소중한 이들의 얼굴이 새삼스러운 하루.
-Cheol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부산을 떠나 원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원주에 막 도착한 버스 차창 밖으로 익숙한 건물들이 보였다. 괜히 길거리를 배회했다. 불 꺼진 예전 집. 한 주에 두 번은 갔던 펍. 애인과 자주 새벽을 보낸 카페. 헤어진 애인의 집. 선선한 바람이 부는 다정한 도시의 분위기가 서글프게 느껴진다. 전에도 그랬지만 도시가 새삼스럽게 더 좁게 느껴졌다. 약속 장소로 가는 길 내내 애틋한 기억들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소방서를 지나고 공원을 지나고 시장에 도착하는 동안 나는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뭘 그렇게 잘못한 일이 많았던지. 그렇게 어렸는지. 내가 없어지고 난 뒤로도 매일 같은 길을 변함없이 다녔을 사람을 생각하니 애틋해졌다. 헤어진 지 몇 년이 지난 뒤에 갑작스러운 연락을 남긴 이유가 오늘 나의 마음 같았을 거라 생각하니 괜히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Ho
2019년 9월 30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