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사백 번째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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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부터 시작한 도란도란 프로젝트. 어느새 도란도란 프로젝트의 멤버들이 400번째 주제의 글을 완성했습니다.
하나의 주제로 마음껏 생각을 드러내고, 마음속 감정을 쓴지도 어느새 7년째입니다.
물론 늘 좋은 글을 써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도 없고,
또 어떤 날, 어떤 이는 글을 쓸 여력과 여유가 없어 그냥 주제를 흘려보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란도란 프로젝트는 소소한 마음들과 감정들이 공유될 수 있는 한 앞으로 계속 이어나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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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편의 글을 꾸준히 써온 도란도란 프로젝트 멤버들에게 늘 감사합니다.
400번째 주제까지 도란도란 프로젝트의 글을 꾸준히 읽어주시는 분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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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지만 다음주 401번 주제부터는 2014년 첫 번째 주제부터 함께해왔던 Cheol의 글을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Cheol의 빈자리는 아쉽지만, Cheol의 앞날이 늘 안녕하길 응원해봅니다.
새로 이사를 했다.
그 때의 집에
많은 것을 버려두고 오려 했다.
같이 샀던 많은 물건들,
그리고 시간, 혹은 추억거리들.
옮겨놓고 보니
퍽 버린것이 없었다.
고스란히 당신의 칫솔까지
챙겨다 놓은
이사업체를 탓해야 할 지,
미련한 나를 원망해야 할 지.
새로 이사온 집 화장실엔
샤워기 헤드가 없어진 채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하하,
기어코 어느 부분이 삐걱대는 구나
싶어 헛웃음이 났다.
조금의 언쟁 끝에
어영부영 그럴싸한 샤워기가
생겼는데
틈새로 물이 샌다.
원래 제것이 아니었던 것들은
저렇게 결국
틈새로 새어나게 된다.
내 것이 아닌 것을
욱여넣다보면 그렇게 되겠지.
완벽한 내 새 샤워기가
생길때까지
불안하겠지.
-Ram
처음 말레이시아에 왔을 때 걱정되었던 것 중 하나는 바로 물. 물에 석회물질이 들어있어서 한국의 물과는 차원이 다르고, 어떤 사람들은 말레이시아 물로 샤워했더니 몸에 두드러기가 났으며,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더욱 뻑뻑해진다는 소리도 있었다. 사실 말레이시아 물엔 사실 얼마나 많은 석회물질이 들어있는지 모른다. 그래도 그 말들이 무서워서 필터를 사서 샤워기에 장착하고, 정기적으로 갈아주고 있다. 사실 필터도 한 달에 한 번 정도 갈아주는데, 새 필터 끼우고 3~4일만 되면 필터가 까맣게 변하긴 한다. 제대로 필터링이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초반엔 그 샤워기 필터조차 잘 믿기지가 않아서 아예 물이 들어오는 수도 자체에 정수가 되는 커다란 필터를 몇 개씩 달아야 하나 고민했었는데, 일단 샤워기 필터만 써도 내 몸엔 이상이 생기지 않았고, 원래부터 두껍고 뻣뻣한 내 머리카락도 체감상으론 전과 다르지 않아서 그냥 샤워기 필터 하나만 믿고 살고 있다. 내 몸이 물에 그렇게 예민하지 않은 건지, 물 필터링이 잘 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물로 인해 고통이 없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
-Hee
1.
어렸을 적엔 부모님과
커 갈 즈음엔 형제나 조카동생과
대학생이 되고서는 밤새 함께 놀은 친구들과
군인이 되고서는 거친 훈련의 끝에 내무반 동기들과
거칠 것 없고 혈기 왕성하던 때.
아무런 생각 없이 나를 씻어내던 때.
그렇게 샤워기를 돌려 썼던 것 같다.
2.
모든 의무를 다 채우고
홀로 나선 사회에서는
자고 일어났을 때, 하루의 일과가 끝났을 때
이제 나만의 것이 되어버린 샤워기로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따듯한 물로
몸과 마음의 노곤함을 따뜻이 씻어내고
속살이 드러난 상처받은 마음을
각종 바디로션과 수분크림으로
살포시 연고질 하고선
상처받은 마음을
침대 속에 밀어넣고
도손 향을 뿌려둔 이불을 붕대삼아
상처를 둘둘 감싸본다.
-Cheol
잔뜩 낀 구름 뒤로 번쩍이는 천둥에 이유 모를 안정을 느끼며 잠들었다 일어났을 때 묘하게 집 안이 조용했다. 창문을 두드리던 거센 비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밤새 돌아가던 선풍기, 냉장고의 잔잔한 소음도 사라진 상태였다. 의아했다. 설마 정전일까. 어릴 때야 종종 겪었었다만 정말이지 오랜만에 겪는 정전이다. 밤새 불어나 종아리까지 차오른 비가 지하로 흘러들어 발전기가 고장 났다. 펌프도 고장 나 물이 나오지 않았고 주차타워도 작동하지 않아 씻지도 못한 채 급하게 택시를 잡아타고 출근했다.
차를 수동으로 내릴 방법은 없다던가요?
저도 왜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 새벽부터 전화가 정말 많이 왔어요. 답답하신 거 저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조금 기다려주세요. 주차타워는 모터를 교체해야 해서 2주는 걸리고, 펌프도 1주는 걸릴 것 같아요. 지금 이 일대 건물이 죄 비슷한 상황이라서 그래요. 렌트비도 목욕탕 비용도 지금은 모르겠어요. 건물주랑 이야기가 돼야 하는 부분인데 이미 수리비로 너무 큰 비용이 들어가서 어떻게 해주실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엘리베이터 수리는 오늘 중으로 될 것 같거든요. 다른 것도 최대한 빠르게 고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관리 업체에 질문 하나를 했을 뿐인데 무용하고 길고 그래서 답답하기만한 답변이 돌아왔다. 새벽부터 지겹도록 들어온 입주민들의 불만과 문의사항을 죽 늘어놓으며 잠시나마 내가 뭘 잘못했나? 싶은 느낌이 들어 다른 질문을 못 하게 했으니 그는 성공했고 나는크게 실패한 딜교환이었다.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수난민이 따로 없네요 정말. 지금이 21년이 맞나 싶어요. 다들 고생이 많으시네요.
1층 직수관 수도는 사용이 가능하니 당분간은 물을 길어다 쓰라는 연락에 집에 있는 아이스박스, 큰 냄비 등 물을 담아올 수 있는 집기들을 죄 가져다 물을 길어오며 하루 새에 입주민을 많이 만났다. 평소에는 마주쳐도 인사도 잘 안 하는 사람들인데 같은 처지라는 동질감에 한 마디씩 위로와 한탄을 주고받았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만 그런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컵으로 바가지처럼 물을 떠 머리를 감으려니 옛날 생각이 나네요. 겨울에 보일러 고장 나면 큰 솥에 끓인 물을 찬물이랑 섞어 머리를 감기도 했었거든요. 옛날에는 흔한 일이었죠. 저는 아침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옆집 가서 씻고 학교를 가기도 했어요.
그때는 이런 게 대수롭지도 않았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착잡한지. 수리가 다 끝나고 평소처럼 샤워기로 몸을 씻을 수 있게 됐을 때, 나는 다행이라는 생각보다 왜 이런 일을 내가 겪어야만 하는지 화가 났다. 그럴 수도 있지, 생각하고 말면 될 일인데 좀처럼 차오른 열이 식지 않는다. 여름이라 그랬을까 마음에 화병이 나서 그랬을까.
-Ho
2021년 9월 5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