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사백 아홉 번째 주제
어느 드라마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가진게 많을 땐 감춰야하고
가진게 없을 땐 과시해야한다고.
가진게 없을 땐 몸집을 부풀려야 한다.
세상이 그렇다.
어쩔수 없다면 세상과 타협해야한다.
그런 뉘앙스였다.
머리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이미 30대의 문턱을 넘었지만
나의 작은 20대는 어땠을까.
나는 작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그렇게 보여지진 않았을까?
나의 내면이 2만원, 3만원짜리로
포장되었던건 아닐까?
가방은 그런 거구나.
내가 아무렇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잣대가 되는,
그런 것.
세상에 여전히 어려운 줄타기를 하는 것 같다.
-Ram
평생을 살아도 절대 내 돈 주고는 사지 않을 것 같았던 백팩을 샀다.
절대 나는 운동화 따윈 신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내 소유의 운동화가 무려 5켤레가 넘는다.
테니스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내가 이제는 테니스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손가락에 반지를 잔뜩 끼는 날보다 손목에 아대를 끼고 나가는 시간들이 늘어나고 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못할 거다, 안 할 거다, 이런 말은 이제 의미를 잃어간다.
장담하기엔 정말 다채롭다.
-Hee
1.
주말 동안 백화점을 전전하며 겨우 원하던 가방을 사들고서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분수에 맞지도 않는 사치품을 샀다는 자괴감은 조금도 없었다. 한 달 치 월급을 뛰어넘은 비싼 가방. 내가 돈 주고 산 물건 중 자동차 다음으로 비싼 물건. 그런데도 실상은 명품 브랜드 입문용 취급을 받는 가방. 프러포즈 선물로 준비한 가방이 고작 입문용 가방일 뿐이라는 사실에 괜히 서글픈 마음만 들었다.
집 사는 데 들일 돈도 부족한데 가방 같은 걸 살 여유가 어디있냐던 생각은 내 차례를 기다리면서 행복한 표정으로 가방을 살펴보는 커플들을 잠시 지켜보는 동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더 좋은 가방을 살까 싶은 충동을 이겨내고 결국 입문용 가방을 사야했던 형편에 대한 아쉬움만 남았다. 애초부터 구매하려고 했던 가방을 겨우겨우 사고서도 찝찝한 기분이 들던 그날 저녁에, 고작 가방 하나에도 날아갈 듯 기뻐하는 지영의 표정에 덩달아 행복했던 어느 밤에, 우리가 연인에서 조금씩 한 가족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묘한 움직임을 느낀다.
2.
가죽공예를 배우면서 들인 강의비와 가죽 값이 300만 원을 훌쩍 넘어갈 때쯤에야 명품 가방을 몇백만 원 주고 사는 이유를 조금 납득할 수 있었다. 카드지갑, 여권케이스, 맥북 케이스를 차례로 만들고 난 다음에 인근 공방 사장 몇몇이 돈을 모아서 산 루이비통 가방을 완전히 분해해서 본뜬 패턴으로 루이비통 가방을 똑같이 만들어냈을 때, 내가 여태 시간 들여 만들어낸 게 고작 공들인 짭일 뿐이라는 현실을 뒤늦게 깨닫고서야 사람들이 명품 가방을 사는 이유를 온전히 이해했다.
-Ho
요즘에야 최대한 몸의 짐을 덜려 들지만, 밖에 나갈 때마다 가방을 챙겼던 적이 있다. 하나 둘 씩 필요한것들을 챙기다 보면 옷 주머니가 모자라 어느새 가방 말고는 그것들을 수용할 수 있는 주머니가 없는 것이다. 한 번도 꺼내보지 않을 책부터 충전기, 상비약 등. 가방 안에는 '필요한 것' 보다는 '필요할 것이라 생각되는 것'들이 가득하고, 나는 보따리 장수마냥 그것을 짊고 나갔다가, 장사를 공 친 사람처럼 그것들을 그대로 가져오곤 했다.
이제는 가방의 모양이 하나의 언어로써 작용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가방의 모양을 해치는 물건은 비닐 봉지만이 유일한 수용소처럼 사용된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가방 안에 갖가지 물건을 넣어둔다. 어쩌면 물건의 수용 또한 하나의 표현일 수 있을까. 한 시대가 지나긴 했지만 투명 가방이 유행했었다. 가방을 좋아하는 나였지만 그 가방만큼은 탐나지 않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활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전시해놓을 자신이 없어서였다.
세상엔 여전히 갖고싶은 가방들이 많다. 그렇지만 요즘엔 선뜻 그것들을 갖겠다 선언치 못한다. 나는 '전시하는' 가방을 갖기에 부족한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으며, 습관을 고치기보다는 아무것도 들지 않겠다고 선언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소고
2021년 11월 7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