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사백 예순 아홉 번째 주제
나는 당장의 일은 금세 까먹는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지나간 기억은 늘 생생하기만 하다.
어린 나를 재우고 나가던
엄마의 모습이라던가,
어릴 적 갔던
경양식 레스토랑의 스프가 맛있었다던가,
그런 기억들이 선명하게 추억으로 남곤 한다.
학교 정문을 지나
강의실까지 가는 길목에 피어있던 가로수도,
도서관도, 강의실의 위치도,
자주먹던 샌드위치도 기억이 난다.
기억이 곧 추억이라면 그렇게도 부르겠지,
요즘은 모든 하루가 뒤죽박죽이다.
늘 보던 사람,
하던 일, 가던 곳
전부 변함이 없는데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억하기 싫은 건지
기억할 것이 없어서인지,
기억력이 나빠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모든게 뒤죽박죽이다.
-Ram
1.
망각은 축복이라는 말이 있지만 축복받고 싶지 않은 순간들도 있는걸. 잊고 싶지 않은 순간들을 소가 되새김질하듯 재차 떠올려보며 잘근잘근 씹고 있지만 언젠가 입안에서 사라질 이물감처럼 갈수록 아득해진다. 베갯잇이 잔뜩 젖도록 눈물 콧물 흘리며 울던 날들, 한심하게 쳐다보는 눈빛, 멀어지는 뒷모습, 입에 담기 부끄러울 정도의 일들 따위의 잊고 싶은 기억들은 생생하게 떠오르고, 추운 겨울에 따뜻한 손을 잡고 걸었던 거리, 사방이 트여있는 카페에서 낮에 맥주를 마셨던 기억, 다정함과 달콤함이 한데 버무려져 설렘으로 다가오던 고백,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쓴 편지들 등 잊고 싶지 않은 기억들은 마음속 어딘가에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새겨 넣으려고 애쓰지만 잡을 수 없는 신기루처럼 멀어져 간다.
2.
음악과 장소들은 나의 기억력을 향상시키는 최고의 도구. 음악은 물론이고 우연히 어떤 장소의 사진을 보면 자연스럽게 그때의 기억들이 떠오르는 마법에 걸리고 만다. 언제부턴가 나는 이것들을 이용해서 잊지 않을 순간들은 꼭 한두 곡의 음악들을 결부시켜버린다. 단단하게 조여진 그것들을 그대로 흡수해버린다.
-Hee
치매 걸린 할머니가 손녀사위를 아들로 또 손자로 알아보고 챙길 때 누군가는 민망해했고, 흐뭇해했고, 분노했다. 아들을 보고도 아저씨라 부르는 할머니가 나를 보고는 아들을 떠올렸지만 누구도 굳이 바로잡지는 않았다. 각별히 여기던 기억의 환기에 얼굴 가득 미소 짓는 표정 때문이었으리라. 기억하고 잊음에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커다란 축복이자 고통인가. 다만 누구에게도 고통을 주기 싫으니 기억은 단지 또렷하고 정확하기만 하면 될 일이다 생각했다. 기억이 흐릿해질 무렵이 되면 난 차라리 그냥 죽어 잊히고 싶다.
-Ho
필요한 것을 기억하려다보면 기존 것들이 잊혀진다. 용량은 한계가 있어서 이제는 하나를 내다 버려야 하나를 기억할 수 있다. 무언가를 보관하기 위해 다른 하나가 버려지는 것은 알 길 없이 서글픈 일이다.
-소고
2023년 1월 1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