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오백 아홉 번째 주제
사실 그런 건 없었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기다려야
쿵짝이 잘맞는 인연이
찾아들지 모른다.
나이 10살에도, 40살에도
언제든지 그 기다림 끝에
찾아올지도,
어쩌면 모를지도 모른다.
기다리지 않더라도
문득 지나간 누군가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기다렸다.
나는 이게 끝이라는 생각에
기다리고 또 기다려보았다.
울어도 보고 떼를 쓰면서,
그렇게 지나가다 보니
어느 날엔 이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 끝이
어떠한 모양이든
그곳으로 다가갈 수 밖에.
나는 너무 오래 기다렸고
너무 지쳤고
바래진 마음이 여기저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이 나의
마음의 끝인 순간이었다.
-Ram
한때 사랑의 표현이, 사랑 고백이 금기였으려나 싶을 정도로 삭막한 때가 있었다. 어떤 이는 마치 먹이를 주듯 특별한 날에만 사랑한다는 표현을 (그래봤자 거의 한 번이었나, 에라이)했고, 어떤 이는 처음 만났을 때 달콤한 말로 나를 현혹시키더니 그 이후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굴었다.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하마터면 그 안주함에 속아 평생 삭막하게 살 뻔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달달하고 올망졸망 표현하는 연애를 하지 않는 스타일인 줄 알았다. 주변에서 늘 누구를 만나든 서로 애정 표현을 많이 하는 친구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만나냐고. 그랬더니 그 친구에게 '난 애정표현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표현을 잘 해주는 사람을 만났을 뿐이야'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 대답을 듣고 다시 내게 자문했다. '내가 누군가를 만날 때 애정 표현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았을 뿐인가? 분명 누군가를 만날 때는 항상 사귀었던 이유가 있었는데, 그 이유를 갖고 있는 사람은 애정표현을 그저 못하는 건가?' 라는 말도 안되는 꼬리물기를 하다 그냥 그만 뒀다.
근데 개뿔. 늘 애정 어린 표현을 하고, 매일매일 날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보니 그동안 그냥 내가 운이 없었던 것뿐이었다. 그냥 그 사람이, 그 사람들이 사랑한다는 말들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만큼 만났는데 그런 표현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선 누가 들어도 그냥 문제가 있어 보였고, (사랑의 표현들을 하지 않는 것이 꼭 화두는 아니었지만) 당사자들 사이에서도 조금씩 나도 모르게 구멍이 나고, 금이 갈 수밖에 없었다. 편안함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 한번 내 마음을 믿은 것에 대해서 어떤 미련도, 후회도 없다. 그저 나는 내가 행복한 선택을 했던 것이지. 그래서 요즘 행복에 겨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Hee
작년 연말 무렵부터 이번 여행을 준비해왔다. 긴 기다림 끝에 추석 연휴에 휴가를 며칠 더해 로마와 파리에 잠시 머물다 왔다. 여행은 아무런 문제 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여행의 감상이 기대에 훨씬 못 미친다는 느낌이 소매치기처럼, 마치 공기처럼 내 주변을 맴돌았다. 그래서 처음 여행 때만큼의 감동이 생기지 않는 이유를 자꾸만 찾게 됐다.
관심도 없는 바티칸이나 루브르에 시간과 체력을 쏟아서. 어쩌면 그때와는 다른 내 현실이 여행에도 영향을 미쳐서. 아니면 단지 첫 여행의 기억이 코로나를 거치며 지나치게 미화됐거나, 기다림이 길어진 만큼 기대감이 필요 이상으로 커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이 뻗자, 일단은 다시 여행에 집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러나저러나 큰돈과 시간을 들여서 온 여행인데 일단은 여행을 충분히 즐겨야 했으니까.
하루하루 빈틈없이 여행했다. 매일매일 2-3만 걸음을 걸었고, 맛있다는 음식들을 사 먹었고, 멋지고 좋은 것들을 눈에 가득 담았다. 그리고 여행이 끝날 무렵, 다음 행선지가 반드시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디든 기약해둔 다음이 남아 있어야 현실을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음은 아무래도 다시 해외 트레킹을 준비하게 될 것 같다. 기다리는 동안 다시 체력을 끌어 올리고 장비들을 차근차근 준비하다 보면 시간이 금새 지나가 있을 것이다. 나는 어쩌면 여행만큼이나 이 기다림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Ho
내가 기다리는 것이 있나?
그냥 하루하루 주어진 대로 살아가고 있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내가 하루동안 받은 친절에 대해서 생각한다.
먼저 나가고도 내가 지나갈 수 있게 문을 잡아주는 낯선 사람들.
비가 많이 온다며 내 퇴근길을 걱정해주는 동료.
늘 내 안부를 살피며 사랑을 보내주는 사람.
우린 떨어져 있지만 또 이어져 있구나.
내가 기다리는 것은 없는 것 같아.
그냥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감사하다.
기다림의 끝은 없지만, 내 삶의 끝은 반드시 존재하기에 살아가는 동안을 친절함으로 따뜻함으로 사랑으로 가득 채우고 싶다.
-인이
2023년 10월 8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