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여든 두 번째 주제
우리는 아마도 지붕을 두드리던 빗방울이
한아름 찾아오던,
그런 장마철에 만났던 것 같다.
빽빽하게 들어찬 공기가
두뺨과 콧등을 간지럽히며 괴롭힐 때에
그런 때에 우리는 만났다.
그녀는 노오란 체크무늬 장우산을 들고
바닥에서 부터 분주히 튀어오르는
물줄기를 피하느라 동동 거렸고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짧게 잘라낸 그녀의 단발 머리가
찰랑 거리며 사르르,
향기를 살랑살랑 내뱉으면
축축한 장마 냄새에 섞여
미묘하게 매혹적인 향기가 되곤 했다.
내리는 비를 차마 다 피하지 못하여
소매끝이 젖어드는 모습도,
우산을 톡톡 털어내고 엉성하게 접는 손길도,
그녀의 그런 매 순간은
끈적이는 공기를 밀어내며
힘껏 안아주고프도록 만들었다
그녀는 그토록 사랑스러웠다.
추적추적,
또 다른 장마가 조금 다가왔다.
너는 그 비를 따라 사라졌는데
장마가 오는 향기에
너도 조금 묻어 오는 것 같더라.
보이지 않아도
네가 여전히 사랑스러울 것임을 안다.
-Ram
1.
여름, 그때 당시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분과 약속했던 날이기도 했다.
밖엔 주룩주룩 비가왔다. 아마 장마라서 비가 왔던 것도 같다. 굉장한 장대비였고, 오래오래 내리던 비였다.
내가 밖에 나갈 때 장대비가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항상 하이힐에 치마를 고집했던 나에게 비란 성가신 존재였다.
장대비가 바닥에서 튀어 내 발을 온통 점령하고, 내 하이힐을 몽땅 적시고,
심지어 종아리까지 모두 빗물이 튀면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내겐 그 흔한 레인부츠 하나 없었다.
그 날도 평소와 같은 복장을 하고 밖에 나갔었다.
약속장소는 꽤나 먼 거리였다. 아마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내려 역에서도 조금 더 걸어야 하는 곳이였다.
지하철에서 내려 역 밖으로 나왔다. 시계를 보니 약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약속시간에 늦기 싫었다.
하이힐과 발가락과 발목에 튀는 수많은 빗방울들 보다 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으로 기억되는게 백 배는 싫었다.
장마가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장대비가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다.
얕은 물 웅덩이는 그냥 첨벙첨벙 밟고 지나갔다.
일단은 내가 그 곳에 제 시간에 도착을 해야 한다는 그 마음 뿐이였다.
그 마음 덕에 물이 잔뜩 들어와 하이힐 바닥이 미끈거려 나의 발가락들이 자꾸 앞으로 쏠려 힘들었지만,
그 힘듬이 제시간에 도착하게끔 만들어주었다.
돌이켜보면 '어떤 것에 대한 망설임'에 대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몸과 마음을 사리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 몸과 마음을 사리지 않아도 될 정도의 일들에 대해 사려버리니 망설임이 따라오게 되고,
결국 나는 망설이고 있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였다.
조금만 더 거침없어도 괜찮았을텐데.
조금만 더 과감해져도 괜찮았을텐데.
조금만 더 용기내어도 괜찮았을텐데.
앞으로는 어떤 일이든 조금 더 거침없고, 조금 더 과감하고, 조금 더 용기를 내어봐야지.
2.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각인시키고, 각인되어버리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계절, 물건, 장소, 혹은 날씨에게도.
장마도 아마.
3.
어느 장마철이다.
조금이라도 더 사랑받고싶어하는 내 자신만 남았다.
-Hee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가 희망하는 꿈이 있다. 자신이 좋아해서 선택한 것이든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설득 당하여 선택한 것이든, 우리에게는 하고 싶은 것이 있다.
정말 기회란 것은 바라는 자에게 간간히 찾아오나 보다. 어떻게 보면 면접을 볼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정말 중요한 기회였던 것 같다. 나의 삶이 송두리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바라보게 되니깐 말이다.
하지만 간절히 바란다고 하여서 꼭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간절히 바라기만 해서 이루어지길 원하는 것도 부적절하다. 그럴 수 있을 만한 자격과 능력을 준비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자격과 능력에 부족한 부분이 존재하였고, 뻔뻔할 수 밖에 없었다. 최선을 다하고 싶었던 나는 그런 부족한 나를 인정한 듯 보였지만 내심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왜곡하였다.
“PM(product manager)이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나는 당황하였다.
나는 이 대목이 상당히 중요한 부분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대답은 나조차도 만족스럽지 못한 ‘둘러대기’였다. 촌철살인과 같은 대답을 내뱉기 위한 사람이 되기. 그런 면에서 나는 이전에 비해 많이 물러터진 사람이었다.
장마는 언젠가 끝이 난다. 그리고 분명히 햇볕은 들게 된다.
지금의 나는 장맛비에 흠뻑 젖어 물에 빠진 생쥐 같은 꼴이지만,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하는 때이다.
-Cheol
온 몸에 기운이라곤 하나도 없이 책장을 넘기는 것 조차 힘겨운 느낌 아시나요. 아쉽게도 이곳에는 비가 오질 않네요. 날은 덥고 또 습한데 마침 방에 에어컨이 고장나는 바람에 이 시간까지도 뭔가 했다고 할 만한 일은 하나도 하지 못한 채 하릴없이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사실 그건 꼭 날씨 탓만은 아닐 거에요.
비 맞는 것을 좋아하는 거 이해하나요? 지금 제 기분이 꼭 비를 맞는 것처럼 좋거든요. 젖으면 안 될 물건들을 집에 놓아두고 젖어도 상관없는 옷들을 가볍게 걸치고 비맞으며 걷는 것을 썩 좋아해요. 아쉽게도 이곳에는 비가 오질 않아요. 창틀에 고여있던 빗물도 반나절만에 증발해버리는 날씨에 비를 맞는 기분이라니 조금 이상해 보일 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요 며칠은 계속 이런 기분에 취해 있었어요. 이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선지 도무지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군요. 그냥 가끔, 좋아하는 음악을 찾아 듣고 편지를 쓰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요. 이 밤도 그렇게 보내고 있죠. 오늘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줄 짧은 편지를 고쳐 써 볼까 해요. 그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장마를 대신해 제게 비를 흩뿌려주고 있거든요.
장마가 오래 이어지면 금새 눅눅해지고 습해진 것들에, 또 아무곳에서나 피어나는 곰팡이들에 조금 움츠러들 지도 모르겠어요. 장마와 같이 불어오는 태풍에는 제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들게 될 지 모르죠. 종종 발목을 넘어서까지 차오르는 빗물에는 허우적거리며 넘어져 다칠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제가 말하고 싶은 장마는 그런 무시무시한, 홍수를 일으킬 만큼 대단한 집중호우를 말하는 건 아니에요. 올해처럼 잊을만 하면 내려주는 자박자박한 비 말이죠. 전에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내려놓고서 가볍고 하염없는 마음으로 빗속을 지나는 기분은 참 좋거든요. 요즘은 그냥 이렇게 장마같은 사람을 쭉 생각하며 지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당신의 밤은 어떤가요?
-Ho
2015년 8월 2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