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여든여섯 번째 주제
여느 날과 같이 그 날은 귀뚜라미같은
밤곤충 우는 소리로 웅웅 거렸고
조용히 낮게 깔리는 바람 소리가
약간 설레이기도 한 그런 날이었다.
여름이 슬슬 물러나려는지
선선한 바람냄새가 머리칼을 간지럽히는
느낌이 기분이 좋아
아무런 약속도 없이 나는 홀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도 모를 곳을 거닐었다.
자박자박,
내 발자국 소리에 귀기울이며 걷는 시간.
밤인데도 나의 손목이며 발가락 끝이
보이는 밤인듯 밤이 아닌 시간.
어둡지만 어둡지 않고
거닐지만 거닐지 않는 기분으로
둥둥 떠다니며 스르륵 그 흔적을 훑는다.
아, 우리는 이 즈음에서
별이 보이지 않는 다는 둥의 대화를 나누었고
너는 보름달이 둥글지 않다며 투덜대었지
너 없이 홀로 걷던 그 날도
사실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잔망스러워
눈을 흘기고
뺨에 스치는 바람이 제법 사나워
걸음을 재촉했다.
너 없이도 나는 제법 잘 걷는구나.
일찍 피어난 가을꽃을 둘러보며
돌아오는 그 길에도
나는 사실 아무렇지도 않았다.
-Ram
1.
식사를 하고 배가 부르면 산책을 하자고 100번 중에 99번은 이야기를 하는데,
요즘은 배가 부르지도 않고, 부러 산책을 하지도 않는다.
단지 무더운 여름날이여서 입맛을 잃은 건 아닐까 생각도 해보고,
혹여나 내 입맛에 음식이 맞지 않는 건 아닐까 생각도 해보지만,
내 체중과 하루에 쓰이는 에너지의 양을 지탱하기 위한 정도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면 곧바로 수저를 내려놓는다.
그렇다고 내가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건 아니다.
대부분 일정한 몸무게였고, 여름이라 조금 더 살이 빠지면 빠졌지 더이상 찌진 않았다.
예상하기로는 아마 음식을 먹고 배를 채운다는 생각보다 그 이면에 완전 다른 생각들이 엉켜있어서 그런건 아닌가싶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머릿 속은 이미 다른 생각들로 엉켜있고, 그러니 음식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 밖에.
맞다. 요즘 나는 갈등과 고민을 하고 있다. 어쩌면 이미 답이 정해져있는 답정너의 짓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충분히 갈등하고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을때 나는 충분히 갈등하고 고민할것이다.
누군가 그랬다. '너는 내가 처음 봤을때, 완전 로봇인 줄 알았어. 로봇같이 매일 새로운 앱을 써보고, 또 써보고 그러잖아.'
그 당시 계속해서 흥미로운 앱이 끊임없이 나올때였고, 지금도 앱스토어를 두리번거리지만 그때처럼 매일매일 받고 있지는 않았기에
저 말이 상당히 내게 크게 와닿았다. 내가 저렇게 보였구나. 내가 저런 사람이였구나.어쩌면 터닝포인트가 될 수도 있는 말.
올해 초까지만 해도 굉장히 정신적으로 약해져서 멘탈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는데.
원래 나는 엄살을 부리면 안되는 사람이야, 라고 생각해서 꾹 참고 조용히 넘어갔던 자그마한 일들에도
괜시리 엄살도 부려보고,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이렇다저렇다 투정도 한번 부려보았다. 내가 이렇게 약한 소릴 한 적이 있었던가.
다시 학교에 복학을 하고, 공부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친구들을 만나고, 여행도 다니면서 그나마 내 삶이 정상궤도에 올랐다.
어쩌면 모든 것은 자존감 싸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일도, 사랑도, 우정도, 여행도, 내 삶도, 내 존재자체도. 이 모든 것이 자존감 싸움이 아닐까.
내 자신과의 싸움이고, 스스로 자존감을 지키고, 지키는 것에 더 나아가 높이고, 높이는 것에 더 나아가 굳건하게 지키는 것이
가장 좋은 필승법이 아닐까.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처럼 나는 다시 굳건해지리라 믿고 있으며, 강해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건강한 몸과 건강한 마음을 갖는 것이 지금의 나에겐 최우선이다.
2.
집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몸이 쑤시는 듯한 기분이였다.
아직 해가 있는 상태여서 산책하기는 내키지 않았고,
이럴땐 운동이 최고지,라는 생각으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아파트 헬스장에 갔다.
아무도 없겠지,라는 생각에 헬스장 문을 열었는데
30대 중반 정도는 되보일까.
한 여자가 요가매트 위에서 열심히 요가 동작을 하고 있었다.
운동할때는 렌즈를 끼지 않기에 자세한 얼굴은 보지 못하고 흐릿하게 몸의 윤곽선만 보였는데,
(그래서 그랬는지 몰라도) 요가와 운동을 엄청 오래한 포스가 풍겼다.
내가 이 날 헬스장에 간 큰 목적은 엄청나게 땡기는 배의 근육통 때문이었다.
4일 전 쯤에 윗몸일으키기를 무리하게 하고나서 생긴 근육통이였는데,
그나마 조금 완화된 시점에서 다시 윗몸일으키기를 해보자는게 가장 큰 목적이다.
사실 2일 전에도 헬스장에 왔었다.
윗몸일으키기를 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배가 아파 20개이상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제대로 누워 다리를 들어올렸다내리기를 반복해봤는데 마치 근육을 쥐어짜는듯한 통증에 눈물이 고였다.
젠장. 그래서 조금 쉬었다가 다시오자는 마음에 다시 헬스장을 찾았다.
열심히 요가하는 여자랑 나랑 단둘이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티비를 켜는 소리가 났다.
티비는 런닝머신에만 달려있기 때문에, 이제 요가는 안하고 런닝머신을 하려나보다, 라고 생각했는데
티비만 켜놓고 다시 요가매트로 돌아와서 요가를 하고 있는게 아닌가?
헬스장에는 음악이 따로 흐르지 않기에 그 여자와 나는 서로 침묵을 지키며 운동을 하다가
가끔 오는 근육통에 신음소리같은 비명소리만 서로 냈었는데, 그 침묵이 뭔가 어색했나보다.
덕분에 티비소리는 운동하는 헬스장의 백색소음이 되었고, 그 여자와 나는 운동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3.
'소리없이 아파하거나 기뻐하는 시간동안에도
가을은 문득 오고 있었어
그러니 오늘도 마음껏 쉬고, 웃고, 행복하자.
오늘이 아닌 어떤 날이라도 우리는 계속 행복할 수 있고
또 다른 누구와도 행복할 수 있어
가을이 온다.
우리는 정말로 오늘도 내일도 행복하자' 라는 내용의 메일이 도착했다.
아마 이 메일을 받아본 난 행복에 겨워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Hee
‘우리는 예전처럼 돌아갈 순 없지만 잘 지내길 바래’
거의 1년만인가, 아니지 2년만에 연락이 왔다. 항상 그렇듯 통보 식으로.
그럼 나는 말한다.
예전처럼 돌아갈 순 없지, 그렇고 말고
그럼에도 아직도 나의 새끼손가락의 굵기는 너의 넷째 손가락의 굵기와 같아.
그렇게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도 있더라.
우리가 이제는 각자를 살아가지만
시간의 흐름에 무엇인가가 무색해질 때
너나 나나 우리 그런 것들을 기준점으로 삼고 살아가자.
그러면서 나는 절대적 진리에 대해 떠올랐다.
대학시절 ‘교수님과의 산책’이라는 시간에 존경하던 교수님과 하던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결국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고 그에 따라 상대적일 수 밖에 없다. 라는 논점에도 저는 결국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아주 큰 범위에서 생각해보면 사실 ‘빅뱅’ 이 후, 우주는 하나의 방향으로 팽창하고 있다는 아주 큰 의미의 절대적인 진리가 결국 존재하는 것이잖아요. 어떠한 ‘존재’에 대해 절대적인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나는 엉터리이지만 나름대로의 ‘절대적 진리’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시간의 흐름에 무엇인가가 무색해질 때,
우리 ‘절대적 진리’를 기준점으로 삼고 살아가자.
-Cheol
1. 여자의 집 근처에 근사한 공원이 하나 있다. 도심지 사이 건물의 조명을 반사하는 호수를 따라 빙 둘러있는 자그마한 공원이다. 요 몇달 새 그 공원을 많이 걸었다. 공원이란 것과 친했던 적이 없던 내게는 고작 1km를 조금 넘는 그 길이 참 많이도 아름다워 보였다. 공원에서 사람들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두셋이 짝이 되어, 혹은 반려동물과 함께 세찬 걸음운동을 한다. 몇몇은 자전거를 타고서 사람들 사이를 위험하게 지나고 또 몇몇은 가쁜 숨을 내쉬며 공원을 총총 뛰어다닌다. 돋자리를 펴고 앉아 호수를 보며 수다하는 사람들과 우리처럼 한량같은 걸음걸이로 공원을 걷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걷는 산책을 요즘은 매일같이 한다. 차가 있은 후로부터 심하게 소홀했던 걸음들이다.
술취한 밤을 걸으면 신발 속에서 목 짧은 양말이 벗겨진다. 걷기대회에 나가기 위한 연습을 한다는 핑계로 매일같이 걸었지만 게 중에는 술취해 비틀거리는 걸음이 절반이었다. 나머지 절반도 그보다 나은 상황은 아니었다. 여자는 개를 볼 때마다 소리를 질러대며 왔던 길을 반대로 걸었고 나는 벗겨지는 양말을 고쳐 신으려 자주 벤치에 앉아 한참을 있었다. 그러다가 공원 맞은편 통닭집에서 다시 또 술을 먹기도 한다. 걷기에 그다지 성실하지는 못했음을 우리는 인정했다. 그래도, 우리가 함께 걸으면 모든 걸음 걸음이 산책이 되곤 했다. 목적지가 분명한 다급한 걸음이 많이 줄었고, 짧고 긴 모든 이동들은 모조리 산책이 되었다. 호수를 낀 공원길과 한번도 다녀온 적 없는 낯설고 마냥 쾌적하지만은 않은 길들이 똑같이 반가워 걷기대회가 끝나도 불성실한 걸음을 게을리 하지 말자는 약속을 했다.
2. 슬리퍼를 넘어 저만치 멀리 나아가 있는 발가락을 보고 있으면 갖은 생각들이 떠오른다. 우스운 건 그 생각들이 모두 구질구질하면서도 전혀 불쾌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슬리퍼 위를 미끄러져 멀리 튀어나가 꼼지락거리는 발가락, 원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해진 양말은 절절한 하루를 열심히 지나온 흔적이었구나. 그러니 제대로 된 운동화 하나 없이 매일같이 슬리퍼를 신고다녔던 어린 시절도 꽤나 산뜻하게 느껴진다.
-Ho
2015년 8월 30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