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프로젝트 - 여든아홉 번째 주제
너는 알까, 알고 있었을까
네 집을 향해 뻗은 길이
저녁 8시즈음 해가 뉘엿뉘엿 질때면,
가로등 불이 반짝이며 노랗게 비추던 것을.
네가 그 길목을 꼭 지나길 바라며
언 손을 호호 불며
나는 그렇게 널 기다리곤 했어
우리가 자주 가던 슈퍼에서
마실줄도 모르는 따스한 커피캔을 사서
주머니에 넣고 널 기다렸어
주고 싶어서, 아니 사실은 보고싶어서.
손이 유난히도 차던 너는
유난히도 따스한 나랑 천생연분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커피가 식기 전에는 네가 오길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
익숙한 실루엣이 살랑살랑 다가오면
가로등 불빛이 네게만 비추는 것만 같았고
어쩌면 시간이 멈춘것만 같았고
채 식지 않은 커피가 고마웠어
나는 여전히 그 골목을 가끔 지나곤 해
너를 기다리던 나도,
나를 기대하던 너도
우리는 모두 그 곳에 없지만
그래도 나는 널 정말 좋아했어.
고마웠어, 너를 기다릴 수 있게 해줘서.
-Ram
생각보다 늦게 온 너는 내게 미안하다고 연신 사과했다.
하지만 나는 사실 너를 기다리지 않았다.
짧지 않은 순간들 동안 나는 내 마음을 살펴보기에 바빴다.
내 손에 들려있던 책의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왕 손에 책이 들려있으니 읽어볼까, 하며 책을 펼쳤지만 전혀 단어와 문장들이 읽히지 않았다.
나는 내게 되묻고 또 되물었다.
물론 100% 객관적이기 힘들지만. 언제나 내 자신을 살펴보듯 잘 하고 있는 지, 정말 괜찮은지.
내 선택과 행동에 조금이나마 내가 놓치고 있는 틈은 없는지.
최대한 감정들을 딱딱하게 만들고, 사실들만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홍수같이 밀려드는 감정들이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자꾸만 나를 흔들었고, 내 마음을 일렁이게 만들었다.
그 감정들에게 속지 않으려고 애썼다.
또다시 눈 깜빡할 사이에 그 감정들에게 휩쓸리고 있는 내게, 나는 자꾸만 밀어내고 속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너에게 진심이냐고 묻고싶진 않았다.
나는 네가 아니기에. 너의 감정들의 농도를 내 마음과 머릿 속에 빗대어 알 수 없기에.
수많은 생각 끝에 나는 나를 믿기로 했다.
너를 느낀 나를 믿기로 했다.
내가 느낀 감정들을 믿기로 했다.
내 두 눈으로 보고, 내 두 귀로 들었던 순간들을 믿기로 했다.
내가 확신하면 할수록 어쩌면 너와 멀어지는 방향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는 일을 걱정하는 내 시간들이 늘 너무나도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런 걱정따윈 지금 내게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내가 느낀 너를 지키려면 나를 믿을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나는 생각했다.
은근하게 나의 사랑을 전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너를 보면 얼마나 좋은지,
너의 뜨거움이 내게 느껴질때 얼마나 따뜻한지,
너에게 안겨있으면 얼마나 설레는지,
너의 체온이 내게 전해질때 얼마나 편안한지,
너의 마음이 내게 닿을때 얼마나 행복한지.
나의 마음을 너에게 차분히 느끼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Hee
1. 자리에 앉았다. 요동치는 심장소리와 함께 땀방울들이 새어나온다. 나를 위해 준비된 얼음물이 곧이어 나온다. 얼음물이 담긴 잔의 표면에 이슬이 맺히는 정도의 시간이 나에게 주어지고 나의 심장을 진정시킨다. 어느정도의 기다림의 시간은 우리를 윤택하게 해준다.
2. 오랜 시간을 기다린다는 것은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대책없이 기다리다보면 그것은 오히려 상대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 합리적으로 받아들일만큼의 시간을 늦게 오는 사람을 위해 배려해주고 그 시간이 지났을 때에는 자리를 정리하는게 깔끔하다. 마음 상할 것도 없이 다음번에 만나면 그만이다. 대책없이 기다리는 것은 어찌보면 우리가 순수하고 아련 했을 때에나 하는 미련한 짓이다.
3. 기다린다. 잠깐의 시간이 지났다. 나의 마음은 아직도 그 사람을 만난다는 생각의 설레임으로 가득 차 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다. 어디쯤일까 궁금하다. 연락이 없다. 걱정된다. 어서 보고싶다. 다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다. 나보다 늦게 들어왔던 손님들이 나간다. 연락이 되지 않는다. 이제는 슬슬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보았으면 좋겠다. 얼마나 지났는지 짐작할 수가 없을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다 읽은 책을 덮는다. 그만 들어가기로 한다. 그 사람이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기다림의 시간으로 전해받았기 때문이다. 조금은 속상하지만 누군가를 위하는 시간을 보냈음에 위안을 삼는다. 미련했던 시절의 나.
-Cheol
1.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사실이 나를 허탈하게 했지만 또 편안하게 만들기도 했다. 애인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뭐라도 할 수 있었지만 무엇도 하지 않았다. 사실 무언가를 하기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도 애매한 시간이긴 했지만. 멍하니 분수대 앞 벤치에 앉아 나처럼 누군가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의 굳은 표정을 보고 있으니 덩달아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카페로 들어가 책을 읽는 게 나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2. 애인이 잘 알아볼 수 있게 문가에 앉아 책을 펼쳤고 문장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집중하려 했지만 글자는 도무지 읽히지 않는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애인일 것만 같은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번번이 올려다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해야 될 일들을 미뤄두고 애써 마련한 시간이 하릴없이 흩어지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3. 이 시간을 아주 흩어버리려 책을 덮었다. 당장은 어떤 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머리 아픈 일들을 얼마간은 내팽개쳐 둬도 괜찮다는 사실이 썩 마음에 든다. 가끔 옷매무새를 다듬고 곧 시작될 주말 저녁의 동선을 재차 되새기는 동안에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 마냥 불쾌하지만은 않은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매정하게 떠난 버스를 기다리듯 조급하지도 않았고 시계를 습관적으로 들여다 볼 필요도 없었다. 수많은 기다림 중에서도 이런 나른하기만 한 기다림은 기분을 퍽 가볍게 만든다.
-Ho
2015년 9월 20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