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도란도란 프로젝트 - 아흔 세 번째 주제

by 도란도란프로젝트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있다.

내가 나이를 먹고 변하는 만큼

분명 부모님도 변하고 계시는데도

사실 10년 전의

엄마, 아빠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돌아보니 우린 함께 늙었지만

당신네들이 우리의 유년 시절을 품는 만큼

우리는 당신의 젊은 시절을 담지 못했다고.


되짚어 보니 퍽 슬픈 얘기다.


스무 살, 집을 떠나며 홀로서기를 시작했지만

아직도 철부지마냥 이틀, 혹은 사흘에 한 번 꼴로

집에 전화를 한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뿐이다.


엄마의 옹고집을 닮았는지,

힘들거나 아픈 얘기는 쏙 빼고

사과 한 쪽으로 끼니를 달래도

거하게 한 상 차려 먹는 중이라고 전화한다.

사실은 이런 저런 일들로 속이 타들어가도

별 탈 없이 나는 잘 살고 있노라 전화한다.


그래도 안다.

엄마도 아빠도 내가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감내하고 있는지.

그래도 우리는 서로 묻지 않는다. 그래도 안다.

아마도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일지도.


나이를 먹는다는 표현이 아직은 서투른 나이지만

나의 세월보다 부모님의 세월을 부여잡고 싶은 문간에서

일부러 더 자주 전화한다.

워낙에 무뚝뚝한 19년을 살아와놓고는

앙탈이며 애교를 전화에 쏟아붇는 이유는 아쉬워서이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이렇게도 어렵다.

3초면 끝나는 통화연결도 여전히 나는 매일하기 어렵다.

나의 안부와 일과 학업과 여러가지를 묻고 싶을 부모님은

어째서인지 매일 전화하지도 않으신다.

어쩌면 묵언의 약속마냥

우리는 그리운 만큼 이틀, 삼일 만에 반가운 전화를 한다.


전화를 하며 나는 오늘도 잘 먹고 잘 지내는 딸이다.

나의 그런 마음이 전하여 질까.

나를 그리는 당신들의 마음을 행여 내가 모를까.

전화 한 통 하기에 썩 나쁘지 않은 밤이다.



-Ram


1.

전화가 왔다.

나는 사무실에서 나와 여자화장실 맨 끝 칸으로 들어갔다.

수화기 너머로 그녀가 학교에 가지 않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심장이 내려 앉았다.

대충 전화를 얼버무려 끊었다.

그녀는 왜 학교에 가지 않았을까.

마음 속에 있는 무엇이 그녀를 힘들게 했을까.

얼마나 그녀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그 이면엔 내 잘못이 있었던 건 아닐까.

나의 충분하지 못한 애정이 그녀를 힘들게 만들진 않았을까.

우리가 같이 있던 시간에 조금이라도 그녀를 더 애정으로 대해줄걸.

엄청난 시간들을 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에게 따뜻하지 못했다.

항상 나를 먼저 생각했고, 그녀는 항상 자의반 타의반으로 내게 양보했다.

나는 항상 그녀의 앞에 있었고, 그녀는 항상 내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어렸던 나는 그녀의 마음을 살펴 볼 겨를은 커녕,

그녀의 생활 전반에 대해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다.

최소한 내가 본 시각에서는 그랬다.

이 모든 것이 다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내 탓인 것 같았다.

순식간에 시야가 흐려졌다.

눈물이 쏟아졌다.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곧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였고,

옷 소매로 눈물을 스윽 훔치고, 휴지로 눈 주변을 꾹꾹 누른 다음에

아무렇지도 않게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때 나는 내가 참으로 미웠다.


2.

전화가 왔다.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몇 년 동안 들으려고 해도 들을 수 없었던 목소리였다.

그렇게 무턱대고 전화를 먼저 할 줄 몰랐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고, 전화를 받으면서도 그 다음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리를 굴렸다.

말하고 싶었다.

내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으며, 어딜 다녀왔으며, 어떻게 진행이 되고 있는지.

하루하루가 숨이 막혔던 시절도 있었고, 왜 지금에서야 연락을 했는지, 왜 연락을 끊었는지.

하지만 모든 이야기는 다 접고, 원망과 욕설보다는 지금 잘 지내고 있냐고 물었다.

수화기 너머로 잘 지내고 있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그래, 그거면 됐다고 이야기했다.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냐고 물었다.

수화기 너머로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다고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현재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 언급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Hee


사랑. 오랜만에 Siri에게 물어보았다.


1.이성의 상대에게 성적으로 이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의 상태.


사랑의 정의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살인적인 일정이란건 어떠한 것일까? 물론 살인적이라는 표현 자체가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내가 느끼기 나름이라지만 갑자기 궁금증이 들었다.

제법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요즘의 나였는데, 하루는 문득 팀장님이 말씀하신다.


"오늘은 cheol씨도 퇴근하고 시간 괜찮죠?"


그렇다. 조촐한 퇴근 후 술자리였다.


"아뇨, 저는 준비해야하는 이력서가 있어서 힘들 것 같아요!"


이건, 사실이었다. 정말로 준비해야하는 이력서가 있어서 친구들과의 저녁 술자리 초대도 취소하였으니까.


어찌되었든 결국 난 술자리에 참석했다. 함께 일하는 조교에게 의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나의 빽빽한 일정들 사이에 새로운 일정을 끼어넣었다.


술자리 자체는 제법 금방 끝이 났다.

그래 이제 어서 집에가서 오늘 하루를 정리하고 쉬어야지. 그래야 주말의 일정도 소화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의 발걸음은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

일정같은건 모두 잊어버리고 음악 속에 파묻혔다.


술 때문이었을까?


그저 나는 자유롭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였을까? 계획에도 없던 엄청난 무리한 일정을 추가해버렸다.


음악과 리듬속에 파묻힌 채,

휴대폰을 본다.


전화, 이맘쯤이면 으레 전화가 오곤 했다.


받지 못할 때도 있었고, 받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렇게 전화를 해주는 그 사람의 존재 만으로도 위안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전화, 이맘쯤이면 으레 전화가 오곤 했다.

이제는 오지 않는 그리고 하지 않는 전화.



-Cheol


아니요. 글쎄 이 말은 조금 난감하기도 해서요. 전화로 하는 말과 얼굴보며 하는 말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거 이해하나요? 물론 마음같아서야 당장에라도 입 밖으로 내어놓고 싶지만 아무래도 어렵겠어요. 물론 당신이 듣고싶어 하는 거 잘 알죠. 일단은 만나요. 전화로 하고싶은 말은 절대 아니거든요.


담배냄새 찌든 누런 벽지, 삐걱대는 침대, 괜시리 불쾌한 수건, 이불, 슬리퍼, 생수, 믹스커피. 불륜행각이나 저지르려 들릴 법한 후미진 여관에서 섹스를 하다가는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싶지 않을 거에요.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2만 원짜리 사랑을 했다는 생각을 하며 후회할 지도 몰라요. 그럼 며칠동안은 당신과 말을 섞고싶지 않을 수도 있고요.


섹스하는 장소에 의미부여를 하는 게 조금 우스운 소리인가요? 그래요. 그런 거 사실 중요하지 않을 지도 몰라요. 반대로 분위기 넘치는 호텔에서 섹스했다고 그게 몇십만 원짜리 섹스가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그래도 싸구려 여인숙이랑 호텔 사이에는 미묘한 다름이 있어요. 하필이면 그 다름이 내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고요.


고작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섹스하는 걸 어떻게 비교하냐 말하지 말아요. 전화로 하는 말이 여관방에서 하는 말처럼 퇴폐적이게 들리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우리 만나서 말하자고요. 우리 마음이 조금이라도 바래지는 걸 원하지는 않잖아요. 사랑한다는 마음이 소리가 되어 전해질 때 우리가 어떻게 변하는 지 보고나서 같이 즐겁자고요.



-Ho


2015년 10월 18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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