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예수님, 어쩌면 부처님이었을 아이들의 가르침
생을 이어나가는 것도 일종의 능력이라면, 저는 저능력자에 속합니다.
40년 가까이 살면서 아직 ‘단독자’로서 이 세상에 존재할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확실히 저는, 저돌적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는 그런 부류는 못됩니다.
사람을 분류한다면 망설임 없이 저능력 쪽에 줄을 서겠지요.
푯말에는 ‘의지박약’이라고 쓰여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그렇게만 인정하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한 가지 제안을 받게 됩니다.
“그럼 죽든가”
기후위기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다가 나온 말이었습니다.
지구 입장에서는 ‘인간 자체가 쓰레기’라는 어떤 의견에 대한 반박이었습니다.
자신을 쓰레기라고 생각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쓰레기라는 말이 퍽 불쾌했겠습니다.
그런 말에 불쾌감을 느낀다면, 확실히 고능력자 부류라고 생각합니다.
고능력자의 말에는 저능력자를 주눅 들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마땅히 저도 주눅 들고 말았습니다.
“그럼 죽든가”
저에게 하는 말도 아니었는데, 그의 말에 완전히 붙들렸습니다.
화두였습니다.
그의 말마따나 존재 이유나 의미를 찾지도 못하면서, 도대체 왜 저는, 죽기로 결심하지 않은 걸까요.
물론 짐작 가는 바는 있습니다.
죽는다는 건 확실히, 의지박약보다는 의지확고 쪽입니다.
‘죽겠다’는 계획력, 마침내 ‘죽는다’라는 실행력.
그걸 해내고 마는 사람들은 확실히 저와는 다른 부류입니다.
그럼 나는 어떤 부류인가.
까딱하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이도저도 아닌 그저 어영부영일까.
살면서 이런 의문은 반복되어 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습관처럼 종교 근처를 어슬렁거렸습니다.
애석하게도 결과는 같았습니다.
저는 딱히 종교와는 인연이 없는 ‘무신론자’ 일뿐이었습니다.
의지할 신도, 긍정할 삶의 가치도 없는데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는 건가.
그렇게 또 이도저도 아닌 지점에서 윤회를 반복해야 할까요.
의문과 냉소가 묻은 질문들이 켜켜이 쌓이지만, 도저히 진도가 안 나갔습니다.
그러다 문득, 질문을 바꿔봤습니다.
그럼 나는 그동안 무슨 동력으로 살아왔나.
누구를 대할 때면 살고 싶어 졌나.
문제를 바꾸자 의외로 답이 수월하게 도출됐습니다.
누군가와 강력히 연결된 느낌을 받을 때면 살고 싶었다는 사실을요.
선택적 고능력이라고 할까요.
나와 연결된 그들이 살아내기를 바란다는 것.
그래서 나도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게 저의 원동력이었습니다.
단독자로서는 영 자신이 없었지만, 그런 강한 유대감을 느낄 때면 의지확고가 되었습니다.
연결감이라는 건, 타인이 마치 나의 일부분처럼 느껴질 때 형성되었습니다.
제가 강하게 접속되는 타인은 대부분 어린이들이었습니다.
어른들에게 생기를 빼앗긴 아이들.
너무 어린 나이에 저능력을 확인해 버린 모습들.
그들을 볼 때면 너무나 슬펐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어떻게든 무엇이든 하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이 서성거려야만 하는 세상이라면, 도대체 내가 살 자격이 있을까.
아이들이 제게 “당신의 삶은 부당하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말이 틀린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이 아이들에게 무엇 하나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요.
저도 아직 풀어내지 못한 문제를 답을 외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제 말을 믿어줄까요.
아이들은 저를 살리는 동시에, 가혹하게 몰아세웠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두려워한 채로 엄마가 되었습니다.
엄마가 세상을 서성거리면 아이는 도대체 어떻게 될까요.
그래서 제가 끝내 찾은 답은 ‘수행’이었습니다.
저능력자도 능히 살아낼 수 있는 함수, 어쩌면 오히려 고능력의 길.
‘수행으로서의 육아’
만약 제가 이 생에 그저 수행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면.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같은 대사에서는 완전히 자유로워도 된다면.
이 길을 가지 않을 수 있을 리가요.
새로운 정체성으로 세상을 보자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제 아이를 보는 시각도 완전히 전복됐습니다.
저는 엄마가 된 것이 아니라, 아이가 저를 엄마로 성립시킨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엄마를 낳아준 창조주입니다.
엄마가 있어 아이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아이가 있어 엄마가 태어납니다.
오래도록 무신론자로 살아온 저로서는 신흥 종교를 만난 셈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저에게, 생생히 현현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저를 살게 한 동력이었습니다.
가장 높은 가르침.
어린이라는 종교입니다.
그동안 서성이는 아이들을 보면 두려웠던 것도 그런 이유였을까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보는 그런 마음이었을까요.
어떤 가르침은 마음이 너무 아려서 외면하고 싶어 집니다.
어떤 가르침은 놀랍도록 혁명적이어서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이 책은, 그 가르침을 잊지 않으려고 씁니다.
세상을 서성이며, 서성거리며, 저를 살려준 아이들을 떠올리며 씁니다.
제가 배운 가르침을 다른 분들에게도 나누고자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