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자의 기도
엄마, 기도하면 소원이 이뤄져?
저희 아이 선준이가 처음 기도에 관심을 가진 건 '크리스마스'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전지전능하신 산타 할아버지께 선물 제목을 가지고 기도를 해야 하니까요.
아이의 사고 패턴을 보고 저는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잠잘 때나 일어날 때, 짜증 날 때 장난할 때도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존재를 아이에게 심어주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산타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코카콜라가 마케팅용으로 만들어낸 캐릭터란 말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에겐 산타는 '인격신'의 하위호환 버전으로 느껴집니다.
어린이에게 '울지 않았다'라는 이유로, 옳지 옳지 잘했어하며 선물을 주는 산타라.
일단 울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특히 남자들에게 '눈물'이 허용되지 않는 건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산타는 선물 자금을 어디에서 끌어오나요?
아시다시피 바로 제 지갑입니다.
산타는 자본 하나 없이, 전 세계 부모의 재산을 끌어다가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있는 겁니다.
선준이는 엄마의 마음을 간파한 것일까요.
아니면 아이가 가진 천연의 자원, '의심'이 발동되었을까요.
아이가 합리적 추론을 시작합니다.
선준 : "산타는 뭐 타고 와?"
엄마 : "루돌프 아니야?"
선준 : "루돌프는 사슴이야. 날지 못하잖아."
엄마 : "..."
선준 : "산타는 비행기를 타고 오겠네"
자연스럽게 산타와 루돌프 조합이 깨지고, 로켓보다 빠른 하루 배송의 미스터리도 풀려나갔습니다.
저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산타의 존재를 아이에게 폭로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의 신앙심은 지키기 위해, 친구들에겐 비밀로 하기로 했고요.
그렇게 선준이는 '레고 21342 곤충컬렉션'의 출처는 대구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준이의 기도는 그렇게 끝이 나는가 싶었습니다.
설마, 그럴 리가 있나요.
세상에는 산타 말고도, 논리적 추론을 이어나가야 하는 존재들이 많습니다.
가령, '돌탑'이라든지.
어느 날 아빠와 아들이 인왕산에 다녀왔습니다.
찍은 사진을 보니 돌탑 앞에 눈을 감고 기도를 드리는 선준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막으려 해도, '기도하는 마음'은 막을 수 없는 걸까요.
이쯤 되면 신의 존재 여부와는 별개로, 기도는 인간 본연의 '욕구'인가 싶기도 합니다.
한 때는 저도 기도를 했습니다.
7살 때까지였습니다.
이후 기도는 멈췄지만, 오랫동안 기도의 효용을 궁리했습니다.
무신론자인 저는 도무지 기도의 쓸모를 알 수 없었거든요.
마음이 평안해진다거나 뭐,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거나. 그런 건 알겠습니다만,
그렇다고 그것이 기도의 궁극적 목적은 아닐 겁니다.
물론, 어린이가 기도를 하는 이유는 비교적 명백해 보입니다.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엄마인 저는, 웬만하면 아이의 소원을 모두 이뤄줍니다.
이뤄줄 수 있는 것만을 기도하는 아이는 천사인가 봅니다.
기도하지 않는 저에게도 꿈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는 데 기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이제는 역으로, 꿈조차 필요 없는 것이 아닌가 골몰하기까지 합니다.
수행을 한 이후, 자주 종종 108배를 하는데요.
관광 삼아 절에 가면 꼭 108배를 하고 옵니다.
남편도 저와 속도를 맞춰 절을 합니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아이도 따라 절을 합니다.
아이의 경우, 절이라기보다는 '누웠다 일어났다'라고 쓰는 게 적합할 것 같습니다.
아이는 법당을 제집처럼 편안히 이용합니다.
'이렇게 까불어도 부처님이 혼을 안 내신다고요?' 하는 심산으로 몸을 뒤트는 것도 같습니다.
절하는 아빠 등에 올라타 부처님의 자비를 한껏 시험합니다.
예상하시는 바와 같이 한 번도 혼난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처님이 좋습니다.
어쨌거나 우리 가족은 각각의 방식으로 부처님 앞에 엎드립니다.
만트라처럼 어떠한 문장들이 흘러나옵니다.
"지금 이대로 좋습니다"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저에게 기도는 무한한 의존성이 아니라 완연한 독립성이었습니다.
제가 기도를 하는 궁극적 이유는, 기도에서 벗어나기 위함입니다.
108배가 아니었다면, 저는 죽기 전까지 흔쾌한 자의로 이마를 바닥에 대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제사상 앞에서도 절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사 음식을 다 차리고, 제사가 끝나면 밤새 설거지도 했지만, 절만은 하기 싫었습니다.
여자라고 절을 안 시킬 때는 좋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상 앞에서는 마치 기독교인처럼 목례만 했더랬습니다.
조상이 보고 계신다면 매번 정성껏 제사상을 차리는 장손 집안에 이렇게 복을 안 주실 수도 있나요?
오기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사상 앞에서는 오히려 더 빳빳해지고 꼿꼿해졌습니다.
그랬던 제가 108배를 하다니요.
그냥 전신운동 하는 셈 친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움직임에 초점을 두니, 기도의 목적은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108배는 그저 '몸의 기도'로 여겨졌습니다.
절을 하려면, 몸에 있는 관절이란 관절은 모두 굽히게 됩니다.
이마를 땅에 대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자세가 성립됩니다.
낮은 자세가 가장 편안하다는 사실도 그제야 알았습니다.
신체 굴절을 모두 활용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가장 편안한 때는 이마를 땅에 대는 순간이니까요.
한용운 시인의 시 '복종'도 조금은 이해가 되어갑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복종이라는 단어는 뭔가 어색해, 순전히 제 맘대로, 복종을 '엎드림'으로 치환해 봅니다.
단숨에 마음에 드는 시 구절이 완성됩니다.
'엎드리고 싶은데 엎드리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여전히 무신론자인 저로서는 마땅한 복종의 대상은 없습니다.
부처님을 경외하지만, 부처님께 엎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절을 할 때마다 가장 많이 떠오르는 감정은 '감사'이지만, 아직 누구에게 무엇이 감사한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굳이 엎드리는 대상을 찾는다면, 그건 어제의 나일 것입니다.
꼿꼿했고 빳빳했던 그 사람 말입니다.
한없이 유연해진 제가 꼿꼿한 과거의 자신에게 엎드려 참회합니다.
엎드리지 못했던 어제를 다독입니다.
꼿꼿한 채로 많이 힘들었겠다고 위로도 해주고 싶습니다.
빳빳했던 어제와, 엎드린 오늘이 만납니다.
둘은 너무도 친근해서 금세 마음을 엽니다.
눈물 콧물 짜며 회포를 풀 것도 없습니다.
이걸로 그만입니다.
이것이 제가 찾은 기도의 효용입니다.
이제는 아이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엄마, 기도하면 소원이 이뤄져?"
아니. 기도하면 소원이 없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