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_ 전쟁과 재난으로 삭막해진 미래 서울
BGM_ What are you doing the rest of your life?, 빌에반스
“딱 한 개야. 절대 잃어버리자 마. 이걸 잃으면 헌터 생활은 끝이나 마찬가지니까.”
리더가 나에게 캡슐을 건낼 때마다 주문처럼 하는 말이었다. 형광 빛을 띤 알약은 빛에 반사되면 묘한 본연의 빛이 났다.
잃어버리지 말라는 건 간직하라는 의미다.
나는 캡슐을 나란히 손바닥에 폈다가 오른쪽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이미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 많았다. 사랑하는 동료들. 직장. 그리고 그녀. 간직할 것이 없어진 지 오래돼서 나는 어떻게 무언가를 지키고 소중히 다뤄야 하는지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주어진 임무에 맞게 낮에는 잠을 자다가 해가 지기 시작하면 삭막한 도시를 걸어 다녔다. 건물이 이미 오래전에 허물어져 이곳이 병원이었는지, 혹은 작은 카페였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핵폭탄이 떨어진 곳에 남은 시신들은 처참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형체가 남아있지 않거나 피에 젖은 옷 때문에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건물이든 사람이든 음식이든 세상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부질없었다. 첨단의 기술을 자랑하며 우주를 정복할 것 같은 이들은 모든 것이 파괴된 그 날 이후 지구는 원시의 우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현재 그의 삶에는 오직 ‘생존’만이 남았다. 생존할 것인가? 생존하지 못할 것인가?
먹고 싶은 것이 아니라 먹을 수 있는 것을 찾아 떠돌았다. 오염된 것을 먹었다가는 오히려 병에 걸릴 수 있으니 조심해야 했다. 그가 풍요롭게 누렸던 것들은 한낱 구름처럼 떠돌다가 사라진 듯 느꼈다.
처음보다는 점차 견딜 만했다. 매일 아침마다 단골 커피에 들려 마시던 산미 가득한 크림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것도, 그토록 좋아했던 여행프로그램을 보지 못하는 것도 견딜 만했다. 그리움이라는 감각이 마비된 것처럼 한순간에 잊었다.
다만 딱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매일 밤 루틴처럼 잠들기 전에 듣곤 했던 ‘빌 에반스’의 재즈 선율이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맞지 않게 근육이 모두 소멸되어 노쇄해진 팔다리를 허물어진 건물더미 위에 간신히 올리고 잠시 쉬기로 했다. 다행히 오염물질들이 대기 중을 떠다니는 헤이즈가 살짝 걷혀 달빛이 비쳤다.
출처: https://blog.naver.com/dinsama/222438178425
평소에 그는 의식적으로 휴식을 거의 취하지 않았다. 휴식시간이 되면 몸이 이완되면서 ‘슬픔’을 견뎌야 했기 때문이다. 슬픔을 느끼지 않기 위해 끝없이 걷거나 음식을 찾거나, 숨어있는 야생의 이리떼를 내쫓았다. 그는 슬픔을 해소하기 위해 더 거칠고 더 자극적인 긴장 속에 자신을 내맡겼다.
휴식이 지속되자 몸이 이완되고 마음이 요동치더니 견딜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다. 슬픔을 넘어 외로움이 몸속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 들자 그는 괴물과 마주했다. 고독이 자신을 잠식할 것만 같았다. 지극히 위험한 신호다.
이럴 때마다 그는 리더가 한 달에 한 번씩 주는 캡슐을 단숨에 꿀꺽 넘겼다. 물도 없이 건조한 목 너머로 삼켜지는 캡슐은 급속도로 혈관 속으로 흡수되어 슬픔을 안도감으로, 혼란스러운 감정을 급속도로 차분하게 정리해 주는 효능을 가진 약이었다.
'빨리 약을 꺼내자!'
그는 서둘러 주머니를 더듬어 캡슐을 먹으려고 꺼냈다. 꺼내자마자 급히 먹으려 목을 한껏 뒤로 젖히다 발끝에 걸린 돌부리에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머리전체에 전해지는 통증이 고통스러웠다. 아마 뒤통수 어디쯤 피가 흐르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손에 쥐고 있던 캡슐이 보이지 않았다! 빨리 찾아야 한다. 헤이즈가 다시 달빛을 가리기 전에 찾아야 한다!
그는 머리에서 나는 핏물 따위는 무시하고 손을 더듬어 주변을 둘러봤다. 캡슐이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헤이즈는 이내 달빛을 감쌌고 그의 시야는 다시 시커멓게 어두워졌다. 그는 흐느꼈다. 고독이 외로움이 그를 잠식하고 이 거대한 우주에 먼지 같은 존재로 혼자 남았음을 느꼈다.
K는 삶의 절반 이상을 같은 곳에서 살아왔지만, 이제 그날 이후 그의 앞에 놓인 모든 세상은 미지의 대상이었다. 몇 만 년 전 거대한 지구 위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던 원시인처럼 느껴졌다. 대기 중의 물질들이 어떻게 그를, 지구를, 우주를 사람들을 변화시킬지 모르는 무지의 시대로 회귀한 셈이다.
캡슐이 없이 고독을 견디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는 소리 지르며 울부짖고 싶었지만 이틀째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서인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쓰러졌고 숨소리가 가빠졌으며 시야는 어두워졌다.
그때!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조금씩 조금씩 커졌다. 누군가 허밍으로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중이었다. 일정한 박자와 선율은 누군가 흥얼거리는 음악인듯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눈을 작게 떴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 그는 이 선율이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빌 에반스의 곡이었다. 그는 음악으로 나에게 삶의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What are you doing the rest of your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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